평양성결교회(평양상수리교회)

평양은 인구 10만 명을 가진 조선의 제 2의 도시였고 가장 대표적인 개신교의 도시였다. 이곳에는 장로교와 감리교를 중심으로 이미 25개소의 교회가 세워져 있었다.

평양성결교회는 동양선교회가 1925년 6월 평안남도 평양에 교회를 개척하기로 결정하고 경성성서학원을 졸업한 이건 전도사를 주임으로 김제근 전도사를 부임으로 파송하고 상수리에 큰 집 한 채를 세내어 예배당으로 수리하고 8월 30일에 남녀 22인이 모여 첫 주일예배를 드림으로 설립되었다.

평양교회는 개척한지 2년 만에 장년 100여 명과 주일학교 120여 명이 모이는 교회로 부흥하였다.  

평양교회는 1928년 7월 6일〜10일까지 교회정원에 천막을 치고 ‘대거전도회’를 열었다.

매일 밤 청중은 500명〜1,000여명에 달하였고 결심자는 100여명이오, 매일 오전 10시에는 성별회로 모여 은혜를 받았다.

이 기간 중 릉라도강(대동강)에서 5명에게 세례예식과 남녀 집사임명식도 있었다.

평양교회는 장소가 협착하여 곤란하던 중 미국 시카코에 사는 한 자매의 후원으로 대지 94평(평양부 상수리 33)을 1,800원에 매수하여 건축공사를 마치고 7월 28일에 신축예배당 헌당식을 거행하였다.

1930년 6월 이건 목사의 후임으로 변남성 목사가 부임하였다. 1932년 10월 24일〜27일까지 정남수 목사를 세워 조직한 ‘전선순회 장막전도대(全鮮巡廻 帳幕傳道隊)’의 ‘장막전도회’가 평양교회에서 극심한 강우(降雨)와 함께 불순한 일기 가운데 열렸다.

대원들이 자동차 위에서 나팔을 불고 북을 치며 시내를 일주하면서 선전하니 자동차가 멈추는 곳마다 인산인해(人山人海)를 이루어 통로가 왕래할 수 없을 만큼 사람들이 모여들었고 저녁 집회에는 3,000여 명의 청중들이 예배에 참석하여 은혜를 받았다.

1933년 9월 9일에 이웃에 있는 양말 공장에서 발화한 화재로 인해 평양교회 주택이 전소되었다.

이어 1934년 초에는 교역자의 임명과 파송의 문제로 교회내외에 어려움을 겪기도 하였다.

7월 16일에는 평양부내 5개 교회 직원들이 상수리교회에 모여 ‘직원연합회’를 조직하였다.

1935년 서부지방회가 3월 11〜17일 상수리교회 예배당에서 열렸다. 1936년 3월 24일부터 경성성서학원 대강당에서 열린 제 3회 총회에서 예상과 달리 서부지방회 회장인 변남성 목사가 3대 총회장으로 선출되었다.

그러나 이사회는 이전 임원과 함께 3차 총회의 결의를 불신임하며 무효임을 선언하고 정치체제를 다시 감독제로 환원 시켰다.

이에 반발한 정남수·곽재근·한성과·변남성·오계식·안형주·김승만 목사와 서재철·양석봉·송태용·김광원·김정기·정희열·이용선 전도사 등의 교역자들을 중심으로 15개 교회(목포·평택·인광리·청량리·창신동·홍제원·매양·상수리·사리원·진남포·대두리·양시 등)가 한꺼번에 성결교회를 탈퇴한다.

1936년 11월 25〜29일 평양 상수리교회에서 ‘하나님의 교회를 창립(현재 나사렛성결교회)’하고 ‘제 1회 공의회’를 개최하여 변남성 목사를 1대 총회장으로 선출한다. 동양선교회는 1936년 3월 30일에 변남성 목사를 파직하고, 박형순 목사를 상수리교회 교역자로 임명한다.

이후 6월 13일 상수리교회를 ‘평양부 상수리 127’로 이전하여 교회 회복을 위해 노력하지만, 결국 8월 25일 상수리교회를 폐지하고 1937년 7월 31일에 박형순 목사를 사리원교회 교역자로 임명한다.

해방 이후 평양 상수리교회가 다시 설립되어 최병률 전도사와 신도 80여명이 모이고 있음을, 이성봉 목사는「활천」, 1946년 8월 15일호에서 ‘서북교회소식’으로 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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