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사참배 맞선 개신교 역사 등 조명
사중복음 목회 적용 실사례도 발표

제10회 한일성결교회 공동역사연구회 포럼이 지난 7월 6일 온라인으로 열렸다. 이번 포럼은 한일성결교회 역사공동연구회가 주최하고, 서울신학대학교 현대기독교역사연구소(소장 박명수 교수)에서 주관했다.

첫 강연에서는 박명수 교수(서울신대 명예)가 ‘일제 말 광주지방법원 소송기록에 나타난 총독부의 한국성결교회의 탄압’이라는 주제로 발표했다. 박 교수는 “일본은 1937년 중일전쟁을 시작하면서 내선일체를 강조하고, 한국인들을 전시동원 체제에 끌어들이려 신사참배를 강요했다”며 “당시 기독교는 신사참배에 반대했던 유일한 단체였는데 개신교는 처음부터 유일신 사상과 우상숭배 반대를 강조했고, 신사참배에 대한 저항이 심했다”고 당시 상황에 대해 설명했다.

개신교의 강력한 반대를 경험한 일본이 다시 시도한 것은 한국의 기독교를 일본 기독교로 만들어 통제하는 것이었다. 교단 별로 일본과 한국의 교회를 하나로 묶어 한국교회를 일본교회의 통치 아래 놓으려고 한 것이다.

박명수 교수는 “일제 말 총독부의 주 관심은 ‘재림’이었다. 특히 성결교회의 재림론은 ‘예수’ 중심의 천년왕국을 만든다는 교리이기 때문에 천황 중심의 대동아공영권과 배치됐다”며 “이처럼 재림은 성결교회에서 가장 중요한 ‘사중복음’ 중 하나이기에 총독부와 직접 부딪히게 됐고, 일제는 이 문제를 심각하게 생각했다”고 전했다.

박 교수에 따르면 결국 일본은 1942년 ‘사상통제정책’을 발표해 일본성결교회 교역자들을 일제히 검거했다. 그는 “일본 경시청은 일본성결교회와 같은 계열이었던 한국성결교회도 폐쇄를 명령했다”며 1943년 5월 24일 탄압이 시작돼 교역자 200명, 장로·집사 100명을 검거했고 이후 9월부터 예배중지령을 내려 12월 29일 성결교회는 폐쇄당했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조선총독부는 12월 28일 성결교회 지도자들을 석방해 29일 오전 서대문 교단본부에 이들을 모이게 해 해산성명서를 가결시켰다. 이렇게 1907년 복음을 전하기 시작한 성결교회는 일본에 의해 문을 닫게 됐다”고 부연했다.

박 교수는 “형식은 자진 해산이지만, 내용은 총독부가 모든 것을 작성하고 간부들에게 강요해 해산시킨 것”이라며 “이 해산성명서에는 일본이 하고자 하는 내용이 다 들어 있었다. 성결교회는 첫째 영미의 영향을 받았다는 것, 둘째 재림사상으로 일본의 국체를 무시했고, 셋째 구약을 강조해 유태 사상을 갖고 있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후 히라노 신지 목사(구미가야교회)가 ‘일본 홀리네스교단의 명칭 및 창립연도 문제에 관한 표명’과 ‘일본 홀리네스교단의 역사’, 장승민 목사(낙원교회)가 ‘기독교대한성결교회 안에서 사중복음의 위치와 목회적 적응’을 각각 발표했다.

장승민 목사는 낙원교회에 부임한 후 현장 목회에 적용하고 있는 사중복음 목회에 대해 발표했다. 장 목사는 사중복음을 한국인의 정서적 필요와 영적 상황을 감안해 전달했다. 일례로 중생반에서는 ‘그리스도인은 거듭난 사람입니다’를, 성결반은 ‘그리스도인은 거룩한 사람입니다’란 주제로 분명한 구원의 확신과 죄의 문제를 다뤘다. 신유반은 공동체적인 분위기를 중요하게 여겨 신유를 이론적으로 이해시키기보다 실제로 경험하기 위한 ‘마가의 다락방 기도모임’과 ‘50일 작정 기도회’로 영적 분위기를 이끌었다.

또한 사중복음을 다음세대의 감성에 맞게 전하기 위해 노력했다. 청년과 학생들에게 사중복음에 대해 쉽게 이해하고 삶에 적용할 수 있도록 제시한 것이다.

장 목사는 “성결교회를 탄생시킨 복음, 성결교회를 성결교회답게 하는 복음은 사중복음”이라며 “모든 나라와 모든 민족 가운데 있는 모든 성결교회가 이 자랑스런 유산을 21세기 청중에게 보다 쉽고 보다 체험적으로 풀어줄 수 있길 바란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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