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 vs 죄성

이성훈 목사(임마누엘교회)
      이성훈 목사
     (임마누엘교회)

어느 날 모세가 아론의 두 아들 엘르아살과 이다말에게 매우 노를 발하며 화를 냈습니다(레 10:16). 그 이유는 아론의 두 아들들이 속죄제물을 거룩한 곳에서 먹지 않고 모두 불태워 버렸기 때문입니다. ‘속죄제’의 규례에는 ‘속죄제’ 제물을 먹어야 하는 경우와 먹지 말아야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첫째, 속죄제물의 피를 성소 안의 ‘분향단’의 뿔에 바른 경우에는 제물을 먹지 말고 모두 태워야 합니다(4:7, 12, 21), 둘째, 피를 성소의 ‘분향단’ 뿔에 바르지 않고 ‘번제단’의 뿔에만 바른 경우에는 반드시 제사장이 거룩한 곳에서 그 제물을 먹어야 했습니다(레 10:17~18).

그런데 아론의 아들들이 성소의 ‘분향단’ 뿔에 피도 바르지 않은 채 속죄제의 제물도 먹지 않고 태움으로써 속죄제의 규례를 어긴 것입니다.

국어 성경에는 번역되어 있지 않으나, 16절에서 ‘보라!’(히. 히네)라는 말을 통해 그들이 제물을 먹지 않고 불태워버린 상황이 매우 의외였음을 보여줍니다.

그래서 모세는 노(怒)를 발하며 아론의 두 아들들을 책망한 것입니다. 이 모습을 본 아론이 모세에게 나답과 아비후의 사건을 언급합니다(19절).

나답과 아비후 사건이란 그 두 사람이 다른 불을 가져다가 분향단에서 분향하다가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죽은 사건입니다.

아버지 아론의 임직식이 마쳐진 후 모세와 아론이 성소에서 나와 백성을 축복할 때 하늘에서 불이 떨어져 번제단의 번제물과 기름을 모두 태우자 모든 백성들이 소리지르며 엎드린 적이 있었습니다(9:24).

그 때에 백성들의 주목을 받고 싶어서였던 나답과 아비후는 임의로 불을 가져다가 분향단에서 분향하다가 심판을 받았던 것입니다.

아론이 이 일을 언급한 것은 아들들의 부끄러운 죄 때문이었습니다. 대제사장으로서 아론은 당연히 속죄제 예식의 한 부분인 번제물을 먹는 과정을 진행해야만 했습니다만, 그들의 죄로 인해 하나님 앞에서 속죄제를 위해 번제물을 먹는 일이 도저히 용납되지 않았습니다. 아론은 자신의 허물을 모세에게 고백했고, 모세는 그의 이야기를 듣고 좋게 여겼습니다(10:20).

비록 아들의 죄이지만 자신의 죄로 여기고 모세에게 자신의 허물을 고백하는 아론의 모습이 무척 감동 깊게 와 닿았습니다. “만일 우리가 죄가 없다고 말하면 스스로 속이”(요일 1:8)는 것이라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혹자는 “우리가 구원 받아서 소위 ‘의인된 죄인’의 신분으로 바뀌었는데 왜 자꾸 죄가 있다고 해야 하느냐”며 반문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말하는 ‘죄’란 ‘죄의 본성’ 즉 ‘죄성(罪性)’을 의미합니다.

비록 우리가 ‘죄사함’을 받고 구원은 받았지만 우리에게는 ‘죄성(罪性)’이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죄’와 ‘죄성(罪性)’은 그 범주가 전혀 다릅니다.

‘죄’는 고백하고 용서를 받았어도 ‘죄성(罪性)’은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구원 받았다고 해서 저절로 죄짓지 않고 살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죄를 범하는 것은 ‘죄성(罪性)’에 자기를 내어 주는 겁니다. ‘죄성(罪性)’을 따르고자 하는 육의 생각과의 처절한 싸움이 있어야 합니다.

까치가 머리위로 날아가는 거야 어찌할 수 없다고 해도 내 머리에 둥지를 트는 것은 막아야 하듯이 말입니다. 그런데 이 싸움이 결코 만만하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은(롬 7:24)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며 탄식 했습니다. 내 안의 ‘죄성(罪性)’은 죄인의 괴수라고 불리워질만큼 그 힘이 엄청납니다.

이는 우리가 주님을 철저히 의지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조련사와 함께 하면 무서운 사자 곁에 가까이 다가 갈 수 있듯이 죄성이라는 사자는 으르렁 거리며 죄라고 하는 피를 찾으려고 위협해도 조련사 되시는 성령님 안에 거하면 문제 없습니다.

주님은 ‘죄’는 물론이요 ‘죄성(罪性)’이 없으십니다(요일 3:5~6). 예수님 안에 거하면 ‘죄성(罪性)’도 우리를 더 이상 건드리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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