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을 살다 보면 잘 되는 일만 있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잘 안되고 깨지는 상황도 있습니다. 기대도 깨지고, 관계도 깨지고, 건강도 깨집니다. 그렇지만 깨진 것들을 하나하나 회복해 나가는 것이 믿음이요, 신앙생활입니다.

창세기 15장에서 목숨을 걸고 하나님과 약속했던 횃불 언약이 창세기 16장에서 깨지게 되었습니다. 법대로 하자면 아브라함은 죽어야만 합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다시 찾아오셨습니다.

17장에서 다시 언약을 맺어 주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깨진 관계를 회복해 주셨습니까? 10~12절에서 하나님은 할례를 행하라고 하십니다. 할례는 외적으로는 남자의 생식기 끝의 포피를 베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라고 하는 약속의 표식”을 몸에 두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내적인 의미는 ‘죽는다’는 뜻입니다. 실제로 아브라함은 육신적으로 할례를 통해 죽었습니다. 그리고 태어난 아들이 이삭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내가 죽을 때, 하나님은 새로운 역사를 이루신다는 것입니다.

여호수아 5장에도 길갈에서 할례를 행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적진의 코앞에서 할례를 행한 것입니다. 혹시 역습을 당하기라도 하면 몰살될 위험까지 있었습니다. 그런데, 거기서 할례를 행한 것입니다. 자기의 전략과 자기의 생각을 죽이고, 하나님의 말씀에 철저히 순종하여 할례를 행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할례는 죽는 것입니다. 내 힘을 죽이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돕지 아니하시면 나는 죽습니다. 하나님만이 내가 살 길입니다” 라는 신앙고백을 몸에 표식으로 새겨 넣은 것입니다. 5절과 15절에 보면 ‘아브람’은 ‘아브라함’으로, ‘사래’는 ‘사라’로 하나님이 이름을 바꿔주셨습니다.

아브람이라는 말은 ‘존귀한 자’라는 뜻입니다. 사래라는 말도 ‘왕비. 공주라는 존귀한 여인’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아브람을 “열국의 아비”라는 뜻의 아브라함으로 바꿔주셨고, 사래도 “열국의 어미”라는 뜻의 사라로 바꿔주셨습니다.

이제는 개인의 존귀함을 위해 살아가는 존재가 아니라, 열국의 모든 사람을 존귀하게 만들며 살아가는 인생이 되라는 하나님의 기대와 사명을 이름 속에 담아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브람을 아브라함이라고 불러주셨다는 말은 “너는 열국의 아버지란다”라는 그 기대와 사명을 이름이 불릴 때마다 잊지 말고 기억하라는 뜻입니다. 이름에 걸맞게 사명을 이루며 살라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하나님께서 ‘아브람’을 ‘아브라함’으로, ‘사래’를 ‘사라’로 바꿔주셨다는 것은 새 출발 하라는 의미였습니다.

이제부터는 너의 존귀함만을 위해 살지 말고, 열국을 품은 아버지와 어머니로 새 출발 하라고 하는 존재의 사명을 이름 속에 새겨주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주님의 제자 된 우리의 이름은 무엇입니까? 신약 성경은 우리를 “그리스도인”이라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도행전 11장 26절에서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처음으로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다”라고 말씀합니다. 제자들은 어디를 가든지 ‘그리스도’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실제로 그리스도와 함께 죽는 자리까지 믿음을 지키며 살았습니다. 할례 정신처럼 우리도 가는 곳마다 나는 죽고,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살아나는 역사가 있기를 바랍니다.

가는 곳마다 “당신은 그리스도인입니다”라고 불리는, 하나님의 기대와 사명을 붙들고 주와 맺은 언약을 신실하게 지키며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언제 어디서나 그리스도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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