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제 법을 신경쓰지 않고 무소불위의 권한을 행사하는 임원회, 선관위, 재판위가 존재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또 필요한 경우가 생기면 스스로에게 유리한 유권해석을 요구할 것입니까?(…)총회 이후 선관위는 해당 유권해석을 경정처리하여 달라고 본 위원회에 정식으로 요청해 온 상황입니다. 헌연위는 그 본연의 기능과 권한이 보장되어야만 정상적인 역할을 수행할 수 있습니다.”

▨… 헌연위는 “제115년차 총회에 관련한 헌법연구위원회 입장문”을 한국성결신문 제1277호에 게재하였다. 총회가 성결인 총회답게 은혜롭게 끝나고 목사부총회장 선거는 한 분이 입후보를 사퇴하므로 그 또한 은혜롭게 정리된 것으로 모든 성결인들은 받아들였다. 그러나 총회의 문제는 역시 정치의 문제라 범인의 머리로는 이해할 수 없는 논란거리가 불거지게 마련인가 보다.

▨… 미련한 머리로 ‘입장문’을 읽고 또 읽어보니 문제의 중심에는 선거관리위원회와 헌법연구위원회가 이마를 마주 대하고 있음을 파악할 수 있었다. 그 모습은 마치, 자학적이라고 꾸중들을지도 모르지만, 홉스(Thomas Hobbes)가 「리바이어던(Leviathan)」에서 그렸던 “왕들과 주권적 권위를 가진 사람들은 언제나 그들의 독립 때문에 끊임없이 경쟁상태에 있으며 무기를 들고 서로 노려보는 검투사의 자세를 취하고 있다”는 표현에 어쩌면 그리도 닮아 있는지, 가슴이 떨렸다.

▨… 선관위가 헌연위의 유권해석을 경정처리하여 주도록 요청할 수 있는지, 헌연위의 기능과 권한의 한계가 어디까지인가는 양측의 ‘법통’들이 결판을 내겠지만 보통의 성결인들은 그 결판이 성결의 은혜를 흩뜨려 버리는 것만은 아니기를 기원하고 있다. 코로나로 교회들이 휘청거리는 때 교단 지도층의 검투사적 자세가 과연 바람직한지 아니, 헌연위, 선관위의 그런 자세를 부추기는 보이지 않는 손은 없는지 묻고 싶어진다.

▨… 성결인들의 교회정치에 마키아벨리(Machiavelli)를 갖다붙이기는 많이 뭣하지만, 마키아벨리는 “이 세계는 좀처럼 바로잡을 수 없는 상상력을 가진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고 사람들은 공적인 관계를 사적인 방식으로 이해하기 때문에 끝없는 투쟁에 휘말린다”(「군주론」)고 일갈하였다. 총회를 무사히 마친 은혜에 감읍하는 성결인들이 마키아벨리의 일갈을 되씹어야 할 이유는 없겠지만 공적인 관계를 사적인 방식으로 이해하여 빚게 되는 막무가내만은 사양해 주시기를 부탁드리고자 한다. 

저작권자 © 한국성결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