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총회를 해야 하는가?

요르단 느보산에 세워진 놋뱀 기둥을 보며 신앙과 불신앙, 의심과 믿음의 경계 선상에 서있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생각하여 본 적이 있다. 또 모세가 바라보고 들어가지 못한 가나안 땅을 바라보며 ‘모세의 마음이 어떠하였을까’라는 생각도 하였다.

지난 한 해 동안 총회본부에서 있었던 사태를 생각하며 ‘거룩한 분노’ 또는 ‘정의의 분노’를 어떻게 이해하고 수용할 수 있는가? 특히, 신앙공동체를 와해시키고 분열시키는 각자가 주장하는 ‘의’를 어떻게 해석하고 적용하여야 할 것인가?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으며, 교회는 특정 건물이 아니라 사람들 이라고 믿는다면, 우리는 사람과 사람사이에 발생하는 사건들을 사회적인 규범이나 법이 아닌 새로운 관점에서, 즉 그리스도의 관점에 해석함이 좋은 방법이 아닐까?

교회는 건물이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고백하고 믿는 이들의 신앙공동체이며 같은 믿음을 따라 신앙생활을 하기로 서약한 사람들의 공동체일진데, 작금의 사태에서 우리의 공동체를 분열시키고 파괴하는 것은 무엇인가? 혹시, 그것이 돈과 세력을 자기의 뜻대로(?) 다룰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는 권력은 아닌가 생각해 본다.

중요한 직책은 아닐지라도 총회에 관련된 위원회의 위원으로 활동하며 느낀 바도 많고 배운 바도 많다. 헌신적으로 봉사하며 본이 되는 분들도 많이 알게 되었고, 그분들의 헌신을 통하여 어떻게 헌신하는가 하는 것도 배웠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이들로 인하여 회의감을 갖게 하는 일들도 있었다.

총회가 며칠 남지 않았다. 필자는 개인의 사견을 전제로 ‘왜, 총회를 매년 해야 하는가?’를 생각해 보았다. 총회를 앞두고, 많은 비용을 들이며 대의원들을 모아놓고 하는 회의의 결과가 무엇이며, 그 결과 교단의 부흥과 발전에 어떠한 유익을 가져 왔는가를 모두 자성하였으면 한다.

총회장을 선출한 이후 회의석을 이탈하는 다수의 대의원들, 상정된 안건의 자료를 제대로 검토하지 못한 채, 주도된 여론으로 통과되는 의안들, 부정과 비리로 얼룩진 사건의 전말에 따라 주류와 비주류로 나뉘어 상처를 주고받는 발언들…. 명확한 식견과 통찰력으로 다루어야 할 사안을 시간에 쫓겨 ‘위임’ 또는 ‘연구하자’는 동의를 얻어 회기를 넘기는 사례를 필자는 많이 보아왔다.

총회를 왜, 하는가? 차라리 3년 내지 4년 임기의 총회장을 선출 후, 매년 마다 지방회 회장과 부회장단으로 구성된 실행위원회에서 년차 회의를 하는 것은 어떨까 생각해 보았다. 또는 대의원의 수를 과감하게 줄여 총회를 하면 안 되는가 하는 생각도 해본다. 

목회 현장은 예전 같지 않다. 이단·사이비들의 적극적인 공세로 목사와 교회들이 너무나 많은 상처를 입고 있다. 반기독교적인 정서를 가진 사회운동가들이 목사와 교회를 신랄하게 공격하는 것을 침묵 하며(?) 방어를 하고 있다. 이처럼 상처를 입으면서도 교회부흥을 위하여 고군분투하는 목사를 보호하여야 할 교단이 진정 우리에게는 없는 것처럼 보인다. 쓰러지고 넘어지는 교회를 붙들어주고 세워줄 총회가 우리에게는 없는 것 같다.

총회는 왜, 해야 하는가? 미국 펜실바니아 주 랭커스터에 있는 아미쉬 마을에서 기독교 신앙의 가치관을 가지고 현대문명에 지배당하지 않고 전통적인 신앙을 존중하며 사는 이들로부터 깊은 감동과 교훈을 얻은 적이 있다. 이후 그곳을 더 깊이 알고 싶었다. 그래서 아미쉬 공동체에 관한 책도 몇 권 읽었다. 목회현장에 참고하여 적용하려고 한다. 그 가운데 정리한 생각을 바탕으로 총회를 바라보며 몇 가지 의견을 제시하고자 한다.

첫째, 비용이 많이 드는 총회에 대한 생각이다. 총회적 차원을 생각한다면 총회 운영비를 과감하게 줄였으면 한다. 특히, 총회 때에 우선, 기념품과 선물을 없애자. 여비 지급을 중단하자. 순서를 맡은 이들에 대한 사례를 없애자. 유인물을 간소화하자. 비용절감 효과가 얼마나 될지 모르겠으나 교단의 새바람을 위한 상징적 의미가 있으리라 생각해본다.

둘째, 총회 임원을 바르게 선출하자. 이 사항은 대의원들이 유념하여야 할 사항이다. 학연, 지연, 금전에 얽혀 거룩한 명예를 너무 값싸게(?) 넘겨주지 말아야 한다. 헌법에 규정된 사항에 결격사유가 없는 자는 누구나 자격이 될 수 있겠지만, 결코 아무나 되어서는 안  되는 자리가 총회 임원이라 생각한다. 그 이유는 교단의 현재와 미래를 책임지고, 미래의 발전과 부흥을 주도할 지도자이기 때문이다. 이를 위하여 몇 가지 요건을 제시해 본다.

교단은 물론 교회가 속한 지역사회에서의 평판, 본인의 생활양식, 과거와 현재의 도덕성, 비전과 리더십, 재능 및 은사, 과거와 현재 교단에 대한 기여도, 마지막으로 필자와 같은 사람이 질문하는 ‘총회는 왜 해야 하는가?’에 대한 명확한 답을 줄 수 있는 사람. 그들이 지도자여야 하고 지도자로 세움받아야 한다.

저작권자 © 한국성결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