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평함과 거룩함을 따르라

           한기채 목사

유대인의 지혜서인 탈무드에 “새날은 언제 오는가?”라는 철학적 질문에 대해 랍비와 제자가 문답하는 내용이 들어 있습니다.  

‘새날’은 동쪽에서 해가 떠오른다든가, 사물이 분간되는 때가 아니라, 창문 밖으로 지나가는 사람이 그들의 ‘형제와 자매로 보일 때’라고 합니다. 우문현답(愚問賢答)입니다. 2019년 교수신문에 보니 교수들이 그해의 사자성어로 ‘공명지조’(共命之鳥)를 선택했다고 합니다.

공명지조란 머리가 두 개인 상상 속의 새인데, 서로 다투다가 머리 하나가 독을 마셔서 상대도 죽이고 자기도 죽는다는 전설입니다. 화합하지 못하면 어떤 파국이 임하는지 잘 형상화하고 있습니다.

근자에 한국 사회는 극한의 대립과 분열 양상을 보이고 있습니다. 남과 북, 진보와 보수, 남성과 여성, 노인과 젊은이, 기득권층과 비기득권층, 부동산 소유자와 비소유자 등 다양한 형태로 갈라져 싸우고 있습니다. 정반대 진영들이 같은 공간에서 시위를 벌이는 진풍경도 펼쳐지고 있습니다.

소통 부재, 이기주의, 당파주의, 선입견, 확증편향이 이런 현상을 확대 재생산하고 있습니다. 이런 혼란 시국일수록 우리는 ‘에포케’ 즉 판단을 잠시 유보하고 상대방의 말을 경청하는 태도를 가져야 합니다.

현재 한국은 초갈등사회로 진입했습니다. 사회통합지수로 보면 OECD 30개국 중 29위를 기록했습니다(2019년). 사회 갈등으로 인한 경제적 손실과 사회적 비용은 막대합니다. 2013년 삼성경제연구소 연구에 따르면 갈등 비용으로 우리나라는 매년 246조 원이 지출된다고 합니다.

이 금액은 GDP의 27%로서, 갈등만 감소시켜도 국민 소득의 증대를 기대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평화를 원하지만, 이 땅에는 진정한 평화가 없습니다. 유대인들은 오래전부터 ‘샬롬’(평강)을 인사말로 사용해 왔습니다. 그런데 이 인사말은 도리어 이 세상에 얼마나 화평이 없는지를 역설적으로 말해줍니다.

예수님의 오심은 이 땅에 화평과 평화를 주시기 위함이라고 천사들이 알려주었다. “지극히 놓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받은 사람들 중의 평화로다”(눅 2:14).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사람들은 예수님을 영접하게 될 것이고, 예수님을 영접하게 된 사람들은 넘치는 평화를 맛보게 될 것입니다. 우선 그들은 하나님과 화평함을 누리고, 그 화평함이 흘러넘쳐 다른 사람들이나 자연 만물에게 확산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 죄를 제거하고 의를 주심으로써 화평함을 주셨습니다. 신자들이 예수님께서 주신 이런 화평함을 계속 누리고 증진하는 길은 성결한 삶, 거룩한 삶을 사는 것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거룩한 삶을 통해 구원의 일부를 누리며 하나님 나라를 앞당겨 체험합니다. 따라서 신자는 행복해지기보다 거룩한 삶을 열망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복음은 ‘죄사함’과 ‘거룩하게 하는 능력’이라는 이중적인 복을 가져옵니다. 구약시대의 속죄제물은 죄를 사하는 은혜는 주었으나 거룩한 삶을 살 능력은 주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이 오신 것은 죄를 용서하기 위한 것만이 아니라 죄를 짓는 데서 우리를 구출하고 거룩한 삶을 살 수 있는 능력까지 주시기 위함입니다. 주님이 이런 은혜를 베푸셨는데, 우리도 믿음으로 화답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우리의 동역이 필요합니다. 특별히 성결한 삶을 위한 우리의 믿음과 의지적 결단이 필요합니다. 신자가 성결한 삶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것은 죄의 관성이나 마음의 완고함 때문입니다.

신자는 자신이 죄에 대해 죽었고 의에 대해서 살아있다는 의식을 가져야 합니다. “나는 매일 죽노라” 한 바울처럼 매일 믿음의 결단이 필요합니다.

호세아와 고멜의 이야기는 신자의 신앙 여정에 대한 경고입니다. 고멜처럼 진창의 삶에서 구원을 받았으면 다시는 부정한 길로 가면 안 됩니다. 토한 것에 돌아가는 개처럼, 씻었다가 다시 구덩이에 눕는 돼지처럼 살면 안 됩니다.

우리는 신랑 되신 그리스도의 정결한 신부가 되어야 합니다. 결혼식이 전부가 아니라 결혼생활이 더 중요하듯, 중생이 전부가 아니라 거룩한 삶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어린아이 신자에서 장성한 신자로 자라가야 합니다.

교회 안에 파벌, 정죄, 소송, 성적 문제가 왜 생깁니까? 교회 대부분의 문제는 성장하지 못한 어린아이 신자에게서 기인합니다. 말하고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이 어리기 때문입니다. 이제 어린아이의 일을 버려야 합니다.

성경은 구원의 단계를 중생(重生), 성결(聖潔) 혹은 성화(聖化), 영화(榮化)로 세분합니다. 중생은 초기 성결일 뿐입니다. 중생의 목적은 성결에 있습니다. 성결은 그리스도의 성품을 닮아가면서 거룩한 성도가 되어 가는 과정입니다.

우리는 그 성결을 가지고 천국에 갑니다. 성경은 구원이 타락한 인간의 본성적 상태로부터 해방됨과 동시에 그리스도로부터 받아 누리는 거룩하고 복된 선물이 있음을 가르칩니다.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엡 4:13).

중생의 씻음을 넘어 거룩함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온전함과 장성함과 충만함에 이르러야 합니다. 성결이 구원의 핵심이요 구원의 필연적인 요소가 됩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화평함과 거룩함’을 말하고 있습니다.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따르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히 12:14).

하나님을 뵈려면 화평함이 필요합니다.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마 5:9). 하지만 거룩함이 있는 화평함이어야 합니다. 거룩함이 없는 화평함은 거짓 평화입니다.

레위기에 따르면 거룩함은 제의적 성결만이 아니라 일상의 성결을 포함합니다. 레위기의 표어처럼 성결은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너희는 거룩하라 나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 거룩함이니라”(레 19:2).

성결은 또한 하나님의 뜻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너희의 거룩함이라”(살전 4:3). 칭의(稱義)와 성화(聖化)는 다릅니다. 칭의는 죄책과 관련되고, 성화는 죄의 권세와 관련됩니다.

중생할 때 하나님은 우리의 죄책을 사해주십니다. 그러나 부패성은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성화와 성결로 비로소 죄성이 사라집니다.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됩니다. 마음의 의도가 순수해집니다. 사랑이 충만해집니다. 온전한 사랑을 할 수 있게 됩니다. 예수님을 닮게 됩니다.

물론 성결은 주님과의 살아 있는 관계이기 때문에 이 땅에서는 완전한 거룩함에는 이를 수 없을 것입니다. 천국에서야 비로소 완전해집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는 것이 거룩한 삶에 이르는 비결일까요? 거룩함에 이르는 다각적인 길이 있습니다.

첫째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갈 2:20)이 성결입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용서와 중생을 위해), 그리스도와 함께 사는 것입니다(거룩과 성결을 위해).

둘째 회개와 믿음, 그리고 말씀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스스로 자신을 깨끗하게 할 수 없습니다. 끊임없이 회개하고 또한 믿음이 계속되어야 합니다. 주님이 주시는 말씀이 우리를 깨끗하게 할 것입니다.

셋째 성령님께 의탁해야 합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으면 거룩한 삶을 살게 됩니다. 성령의 감동을 따라 살아가야 합니다. 성령님과 보폭을 맞춰 걸어가야 합니다. “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할지니”(갈 5:25). 지금 이 시대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성결성 회복 운동입니다.

“기독교가 현대 사회에 필요한 모든 자원을 가지고 있는데, 왜 사회의 지탄의 대상이 되고 있는가?” 이 질문에 대해 제임스 패커는 “현대 그리스도인의 관심은 거룩함에 있지 않다. 단지 재미나 성취감을 추구하고, 현세의 성공을 위한 기술이나 자신의 구미에 맞는 메시지를 선호합니다”라고 하면서 문제의 핵심을 간파합니다.

우리의 불행은 기독교인들이 거룩함을 잃어버렸고, 거룩함에 더 이상 관심을 두지 않는다는 데 있습니다. 그는 “거룩함이란 믿음이 있다는 증거요 회개하였다는 표시”라고 말했습니다.

거룩함이 믿음의 바로미터라는 말입니다. 존 웨슬리, 리처드 백스터, 앤드류 머레이, 오스왈드 챔버스 같은 분들은 당대에 성결 운동을 주도했습니다. 타락하고 어두운 시대에 성결의 빛을 비추어, 한 시대를 다시 하나님께 돌려놓았습니다. 이제 우리 차례입니다.

우리 주변에 보면 음식, 풍습, 생활, 오락, 가치관, 습관 등 우리를 다시 죄의 구렁텅이로 빠뜨릴 부정한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듣고, 보고, 먹는 것이 성결한 삶을 방해하는 것들이 많습니다.

술, 성적 문란, 탐욕, 정욕, 시기심, 복수심, 미움, 교만, 험담, 폭력, 방종, 허영, 혈기 등 우리가 붙들고 싸워야 할 것들이 많습니다. 성결한 삶, 거룩한 삶을 위해서는 대가를 지불해야 합니다. 온전히 헌신해야 합니다.

성결을 위한 처절한 싸움이 필요합니다. 피를 흘리기까지 죄와 싸워야 합니다. 영과 육의 치열한 싸움을 각오해야 합니다. 성령과 육체의 욕망 사이에 한 치 양보 없는 줄다리기에도 참여해야 합니다.

때로 성결을 위한 몸부림에 지쳐서 낙망이 될 수도 있습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 7:24). 하지만 성결은 하나님의 섭리적 계획의 일부입니다.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가 정욕 때문에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느니라”(벧후 1:4).

그리고 우리에게는 큰 도움이 계십니다. 바로 우리 안에 계신 성령님이십니다. 우리를 거듭나게 한 믿음으로 우리는 또한 성령의 불세례를 받게 되면 승리하게 될 것입니다. 그 일을 위해 우리는 깨어 항상 기도하고 경성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개인적 성결을 넘어 사회적 성결로, 교회의 성결, 교단의 성결로 나아가야 합니다. 21세기를 맞은 우리에게 거룩함이 우리의 힘입니다. 우리의 승리입니다. 화평함과 거룩함이 충만한 삶을 사시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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