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가 사회에 걱정을 끼치는 집단이 아니라 
사회를 위해 꼭 필요한 존재임을 입증할 때이다.

       박창훈 교수

코로나19로 인해, 우리가 일상을 잃어버린 지 벌써 일 년 반을 넘고 있다. 그래서 이번 존 웨슬리 회심 주간에는 특별히 질병과 치료에 대한 웨슬리의 관심과 활동에 주목하는 것이 필요하다.

사실 루터를 포함한 종교개혁가들은 당시 치명적인 감염병이었던 흑사병이 퍼지자 “빨리 도망가라, 멀리 도망가라, 그리고 늦게 돌아오라”는 방역지침을 가지고 신자들을 권면했으며, 근대적인 돌봄과 병원의 발전에 기여하였다. 웨슬리도 질병의 치료에 적극적인 행동을 보인 목회자였다.

1745년 브리스톨 연회에서 런던, 브리스톨, 그리고 뉴캐슬에 병자들에게 나누어 줄 약을 비치할 것을 결의하고, 이를 위해 웨슬리는 ‘가난한 사람들이 사용할 수 있는 처방전 모음’을 발간하였다.

또한 당시에는 지방의 가난한 사람들에게까지 전달되는 의료체계가 발전되지 않았기 때문에, 웨슬리는 1747년 당시의 의학지식을 종합한 『원초적 의술』이라는 책을 만들어, 설교자들이 하나님의 말씀만이 아니라 아픈 사람들의 상황과 처지에 맞는 간단하고 긴급한 의술을 시행하도록 권면하였다.

이『원초적 의술』의 서문에서 웨슬리는 모든 질병이 타락과 하나님에 대한 반역에서 유래되었다는 생각을 밝히고 있다. 그래서 생사의 권한을 가지신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기도하라고 강조하였다.

질병을 통해, 결국 우리가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는 것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가르쳤던 것이다.

브리스톨에서 지독한 기침으로 고생을 했던 웨슬리는 많은 사람 앞에서 울부짖는 간절한 믿음의 기도를 통해 고침을 받은 체험을 하였다. 웨슬리는 런던에서도 기도로 자신의 병이 나았다는 기록을 남기면서, ‘위대한 의사’이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

결국 치료는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라는 믿음을 갖고 있었다. 웨슬리는 질병에 대해서 당시 가장 앞선 의학기술을 충분히 활용하면서 그 질병과 치료에 대한 진지한 신학적 의미를 묻고, 이를 통해 하나님과 건강하고 성숙한 관계로 나아갈 것을 강조하였다.

성결운동가이며 미국의 신유운동을 이끌었던 찰스 컬리스는 보스턴 병원의 의사였다. 자신의 병이 낫는 신유의 체험이 있었던 컬리스는 병자들을 위한 처방을 하면서도, 질병을 치료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가질 것을 강조하였고, 병자들의 환경과 처우를 개선하려는 운동을 함께 펼쳤다. 질병과 그 치료에 대한 웨슬리의 활동을 보면서, 다음과 같은 몇 가지를 생각하게 된다.

첫째, 은혜의 수단(기도, 말씀묵상, 금식, 성도의 교제, 성찬, 애찬, 구제 등)에 참여함으로, 예측할 수 없는 하나님의 손길을 고백하며 신앙의 길에서 어긋나는 점은 없었는지 깊이 성찰해야 한다. 세상의 아픔과 어려움 속에서, 은밀하지만 분명한 하나님의 존재와 능력을 새롭게 의식하고, 자신을 돌아볼 수 있는 자만이 성결한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이다.

둘째, 중병을 앓고 있는 사람들, 두려움 속에서 살면서도 서로를 위해 애쓰는 모든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기와 돌보기를 멈추지 말아야 한다. 병자들을 직접 치료하고 돌보는 의료진들, 치료수단과 보호수단을 찾는 연구자들, 결정을 책임진 방역본부,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가족들을 위해, 교회는 기도하며 도움이 되도록 행동해야 한다.

이들을 위한 기도는 웨슬리가 지적한 것처럼, 반드시 우리의 구체적인 행동으로 나타나야 한다. 특히 성숙한 시민의식을 가진 신앙인들이 되도록 해야 할 것이다. 우는 자들과 함께 울 수 있는 공감능력이 있는 신앙인들, 그래서 교회가 사회에 걱정을 끼치는 집단이 아니라 사회를 위해 꼭 필요한 존재임을 입증할 때이다.

셋째, 예방과 치료를 위한 격리로 인해서 파생된 배제, 낙인, 소외를 극복할 공동체적 영성을 회복해야 한다. 방역이라는 이름으로 피치 못하게 격리로 인해 만들어진 배제, 낙인, 그리고 소외에 대해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를 묻고 답하는 것이 바로 그리스도인들의 몫이다.

치료(cure)를 위한 의술은 빠르게 발달하지만, 상대적으로 축소되어가는 인간의 공동체적 영성을 돌보는(care) 일을 해야 한다. 이 공동체적 영성의 회복이 바로 신유의 복음의 목적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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