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 앞에서 경험하는 경외감

1년이 넘게 지속되는 코로나 속에서도, 부활의 예수님은 어김없이 우리에게 소망을 주고 계십니다. 오히려 코로나라는 상황은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을 돌아보는 계기가 됩니다.

도대체 우리 교회 공동체는 무엇을 잃어버린 것일까? 무엇을 회복해야 할까? 여기저기서 많은 주장들이 나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주님을 향한 경외감을 잃어버린 것이 가장 큰 문제이고, 그것의 회복이 급선무가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신앙의 출발점은 주님을 만나는데 있습니다.

그런데 그 주님을 만나면 유한한 인간이 무한한 주님 앞에서 두렵고 떨리는, 그러나 놀라운 위엄 앞에서 경외감을 경험하게 됩니다. 이것이 진정한 신앙의 출발이 되는 것이지요. 예수님의 제자들도 예수님을 처음 만났을 때, 경외감을 경험하였습니다.

이 경외감은 어부였던 제자들이 배와 그물을 버려두고 예수님을 좇도록 한 힘의 근원이었습니다. 마태복음 4장 18~20절을 보면, 물고기를 잡기 위해 그물을 준비하고 있었던 어부들에게 예수님께서 “나를 따라오너라”라고 초청하시자 그들은 그물을 버려두고 예수님을 좇았다고 결과만을 기록하였습니다.

그런데 누가복음 5장 1~11절을 보면, 그들이 예수님을 만나 그물을 버려두고 예수님을 좇아야만 했던 사건을 상세히 기록하고 있습니다.

물고기를 잡는데 일가견이 있었던 베드로와 그 동업자들이 밤새도록 잡지 못한 물고기를, 목수의 아들이신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졌을 때 가득 채워지는 사건을 보며 예수님을 향한 경외감을 경험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물을 던지라는 예수님의 명령에 대한 베드로의 순종은 무조건적인 순종이라고는 볼 수 없을 것 같습니다. 무조건적인 순종이라면 예수님의 말씀에 어떠한 토도 달지 않고 순종했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밤이 새도록 수고하였으되 잡은 것이 없다”는 단서를 붙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어떻게 보자면 베드로는 자신의 옳음을 보여주려고 했을지도 모릅니다.

즉 ‘당신이 감동 있는 말씀을 전하고, 사람들을 끌어모으며 그 사람들을 좌지우지할 능력이 있어 보이기는 하지만 고기 잡는 일에는 당신보다 내가 우선이요!’라는 것을 예수님 앞에서 보여주고 싶었을지도 모릅니다.

많은 사람 앞에서 능력 있게 말씀을 전하신 분 앞에서 내가 옳다는 것을 인정받는 것은 밤새 고기를 잡지 못한 것에 대한 보상일 수도 있고, 자신을 자위할 수 있는 일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자신의 계획이 산산조각 났습니다. 전혀 기대할 수 없는 일이 있어났습니다. 그때 베드로는 예수님을 향하여 “주여!”라고 호칭합니다.

분명 그물을 던지기 전에는 “선생님”이라고 호칭하였던 베드로였습니다. 베드로는 ‘무릎을 꿇었’습니다. 이것은 어느 누구도 강요하지 않는 일이었습니다. 자신의 앞에 서 있는 젊은 목수의 아들에게 압도되어 자신도 모르게 무릎을 꿇은 것입니다.

왜 이러한 복종과 굴복의 표현이 나왔을까요? 그것은 예수님의 경이적인 능력과 위엄에 대한 베드로의 직접적인 체험에서 기인한 것입니다. 주님에 대한 경외감은 바로 여기서부터 시작됩니다.

베드로는 “주여! 나를 떠나소서!”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을 처음으로 경험할 때 일어나는 감정은 두려움입니다.

두려움은 내가 자신을 컨트롤 할 수 없을 때 밀려오는 감정입니다. 그런데 베드로가 그와 같은 경험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유한한 인간이 무한한 하나님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베드로의 이러한 고백은 자신의 인생을 항복한 고백입니다.

그리고 베드로는 ‘죄인’임을 고백합니다. 하나님의 경외를 경험한 사람은 자신의 모습을 바라볼 수 있게 됩니다. 그것은 죄투성이인 모습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하는 순간 자신이 죄인으로 보여졌습니다.

예수님은 한 번도 베드로의 죄를 지적하거나 자백을 유도하지 않으셨습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이 주님으로 고백되어 질 때, 그곳에서 우리의 본 모습이 드러날 수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향한 경외감을 경험한 사람에게 발견할 수 있는 변화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날 우리의 신앙에서도 하나님을 향한 경외감이 회복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또한 교회 공동체는 그 하나님에 대한 경외감을 경험시켜줄 수 있는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어디서 가능합니까? 십자가 아래서 가능합니다.

경외감이라고 할 때, 우리는 막연히 두렵고 떨리는 감정만 떠올려서 선뜻 하나님께 나서지 못합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셔서 직접 죽어주신 십자가는 무한과 유한의 간격을 좁혀줄 뿐만 아니라, 이어주는 역할을 합니다. 그 십자가의 사랑 안에서 진정한 경외감을 경험할 수 있게 되는 것이지요!

십자가가 없었더라면, 유대인들처럼 하나님을 두려운 분으로만 여겨 감히 그 이름조차 부를 수 없는 존재가 되어버리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사랑의 증표인 십자가가 있습니다. 그 안에서 그분의 사랑과 그분을 향한 경외감이 함께 경험되어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할 수 있는 경험이 갱신되어 “나를 떠나소서”라는 처절한 절규가 재현될 때, 교회 공동체는 비로소 갱신과 부흥을 경험할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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