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법은 하나님 사랑의 표현입니다

       이성훈 목사

막달라 마리아에 관한 이야기가 영화화 된 적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시몬의 초청을 받아 그의 집에 가셨을 때의 일입니다. 초청받아서 온 마을 유지들과 사람들로 인해 분위기는 한껏 들떠 있었습니다.

이 때 마을에서 창녀라고 알려진 마리아가 예수님을 좆아 들어와 눈물과 자신의 머리털로 예수님의 발을 씻고 발에 입을 맞추기 시작하는게 아니겠습니까!

여기 저기서 수군거리며 손가락질을 하는 사람들과 달리 예수님은 평안한 얼굴을 하고 막달라 마리아의 행동을 바라보시었습니다.

그 때 사람들은 그 여인을 율법을 어긴 패륜녀로 여긴 사람들과 달리 자연스럽게 그 여인을 대하는 예수님의 모습에 얼마나 감동을 받았는지 모릅니다.

출애굽하여 3개월만에 시내산에 도착한 이스라엘 백성을 향해 하나님은 (출 20:2)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네 하나님 여호와니라”라고 선포하셨습니다.

그 후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십계명’(출 20:1~17)과 소위 ‘언약의 책’(출 20:22~24:18)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율법을 주신 후에 이스라엘을 구원하셨다고 하는 선포가 있었던 것이 아니라, 먼저 선포가 있은 후 율법을 주셨다는 사실이 의미심장합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구원하신 후 율법을 주셨다는 것은 율법이 결코 구원의 조건이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출애굽 사건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율법’은 이러한 ‘하나님의 은혜’에 둘러싸여 있습니다.

따라서 율법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세우기 위함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과의 관계를 지속시키고 풍부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반복하지만 율법은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에 둘러싸여 있기 때문입니다.

이를 테면 출애굽기 21장 2절은 “네가 히브리 종을 사면 그는 여섯 해 동안 섬길 것이요 일곱째 해에는 몸값을 물지 않고 나가 자유인이 될 것이며”라는 규정은 그 한 예가 될 수 있습니다.

이 규정은 어쩌다가 경제적인 여건으로 인하여 종이 된 사람을 일평생 종의 신분으로 묶어둘 수는 없다는 하나님의 사랑에 기초합니다.

한 사람이 주인이 되고 다른 사람이 그의 종이 되는 신분상의 차이는 아무리 경제적인 여건 때문이라고 해도 그저 6년 정도면 족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은 인간은 너무 소중하며 평등하다는 생각이 밑바탕에 깔려 있는 것입니다.

출 22장 21~24절은 이방 나그네를 절대로 ‘압제’(히.로야나 21절)하거나 ‘계속적으로 학대’(히.라하츠 21절)하지 말고, 과부나 고아를 해롭게 하지 말라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만일 그렇게 하지 않으면 “하나님이 칼로 그 사람을 죽여서 그 아내는 과부가 되게 하고 자녀는 고아가 되게 하겠다”는 것입니다.

이 율법을 주신 것은 그들을 학대하지 않아야 하는 것이 당연함에도 불구하고 과부와 고아를 괴롭히는 행동이 자행되었음을 짐작케 합니다.

하나님이 가해자를 죽이고 그 가족이 똑같은 학대를 받게 하시겠다는 것은 그 만큼 정상적인 가족생활을 하지 못하게 된 나그네와 과부 그리고 고아를 긍휼히 여기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사랑에 기인하여 생긴 규정입니다.

안식일을 기억하며 거룩히 지키라는 것은 하나님이 주신 율법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지키고자 애쓰는 바리새인들을 예수님이 책망하신 이유가 있습니다.

그들은 그 율법을 마치 신주단지처럼 섬기려 하고, 인간을 그저 율법을 지키는 도구로 보았기 때문입니다. 율법이 중요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그들은 율법에 담긴 하나님의 사랑과 사람을 놓쳤던 것입니다.

그러한 그들에게 예수님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라 안식일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라고 하심으로 사람을 보신 것입니다. 이는 예수님이 이 땅에 육신을 입고 오신 목적이기도 했습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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