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설교자가 ‘날 때부터 맹인 된 사람’의 장애 원인에 대한 예수님과 제자들 간의 대화(요 9:1~7)를 본문으로 ‘장애인=죄인’이라는 도식으로 설교하는 것을 들으며 놀란 적이 있습니다.

설교 요지는 “날 때부터 맹인 된 사람의 부모가 얼마나 큰 죄, 얼마나 많은 죄를 지었으면 하나님께서 그의 자식을 태어날 때부터 앞을 보지 못하게 했을까. 우리는 감사하게도 그렇게 태어나지 않았으니, 부모의 신앙을 본받도록 하되 스스로 죄를 짓지 않도록 깨어 있어야 한다”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분의 성서 이해를 비판할 신학적 사고와 주석 능력이 없었지만 왠지 거부감이 들었습니다. 당시 저는 한 장애인 복지기관에서 실습을 하고 있었는데 장애 아동과 부모의 소통과 친밀감 형성을 위한 시간으로 매주 다섯 쌍의 장애인 자녀와 부모의 수영 교실을 진행하였습니다.

어느 날 한 어머니가 직장 문제로 참석이 어렵다고 하여 내가 대신 참여한 적이 있었습니다. 하루 일과를 마감하는 시간에 아이를 데리러 온 어머니와 잠시 차를 마시며 대화를 이어가던 중 그 가정의 사정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분에게는 세 명의 자녀가 있었는데 세 명 모두 각각 다른 장애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장애와 상관없이 사랑스러운 아이들이었고 정성을 다해 보살피고 신앙으로 어려움을 견디어 왔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무슨 죄를 지었기에 하나님은 나에게 이런 고난을 주셨을까요?”라고 질문하는 것이 자신이 할 수 있는 기도의 전부라고 말했습니다.

‘장애’(disability)의 원인을 ‘죄’에서 찾는 설교자와 장애 아동의 어머니는 서로 다른 상황에 놓였으나 장애인은 ‘고침’(cured) 받아야 할 대상이라고 본다는 기본적 전제는 같았습니다. 잘못된 전제는 잘못된 이해를 낳을 수밖에 없습니다.

고침을 받아야 할 대상으로 보는 시각을 가지면 ‘장애라는 독특한 경험을 가졌으나 주체적인 존재’로서의 인격을 인식할 수 없습니다.

비장애인을 ‘치유자’(healer)라는 이름으로 포장하면 우리는 은연중에 신체적, 정서적, 사회적 우월감을 가지게 되고 비장애인과 장애인의 관계 또한 힘의 차이에서 비롯된 ‘시혜자’(benefactor)와 ‘수혜자’(beneficiary)의 관계로 굳어집니다.

이러한 전제, 이해, 그리고 도식은 교회 안에서도 비판 없이 일상화되었고 결국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장애로 비롯된 고통으로부터 벗어나게 해주거나 고침받을 수 있다는 전제 아래 ‘장애인 선교’라는 일방적인 신학적 실천을 이끌어 냈습니다.  

이렇게 긴 연결 고리를 이해하고 나면, 우리가 일상에서 무의식적으로 사용하는 언어에 대한 점검이 필요합니다.

사람의 생각은 언어에 오롯이 담기기 때문입니다. 장애인을 비하하는 표현은 우리의 일상에 생각보다 훨씬 더 깊이 스며들어 있습니다.

‘귀머거리’, ‘벙어리’, ‘장님’, ‘절름발이’, ‘불구자’ 등 부족하고 열등하다는 뜻의 말을 쓰는 사람들은 언제나 의도적이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차별의 문제를 깊이 연구하고 실천하며 사는 이도 의식하지 못한 채로 ‘결정장애’라는 용어를 썼음을 반성하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단순히 몇몇 단어를 쓰지 않는다고 해결될 문제는 아니었다. 왜 이런 말이 모욕이 되는지를 이해하지 않으면 표현만 다를 뿐 비슷한 말을 하거나 말이 아니라도 눈빛과 행동에서 드러날 것이다.

다행히도 이런 말이 왜 모욕이 되는지 알아내는 방법은 어렵지 않았다. 이런 말이 어떻게 들리는지 당사자에게 물어보면 된다.”(선량한 차별주의자, 김지혜)

‘정의’란 ‘옳은 관계’를 말합니다. 우리는 모두 연결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서로 의지하며 살고 있기에 정의를 위한 길을 정의롭게 걸어가야 합니다.

‘누군가’를 위한다면서도 장애인을 비롯한 사회적 약자를 비하하는 표현을 무심코 사용했다면, 내가 잘못된 길에 들어섰거나 잘못된 방법으로 길을 가고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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