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성호 교수(서울신대)

구약성경 이스라엘 역사의 성군(成君) 중 하나로 꼽히는 히스기야는 예수 그리스도 탄생을 예언한 이사야 선지자와 연결되며 모범적인 신앙인으로 칭송받고 있다.

25세에 왕으로 즉위하여 29년 동안 재위하는 동안 신앙에 근거한 선정을 베풀었고, 하나님에 의해 15년의 수명을 연장받은 덕분에 39세에서 마감할 운명이 54세까지 생존하는 엄청난 반전을 경험하면서 긍정적인 믿음의 상징으로 거론된다.

전지전능한 하나님의 직접 개입이 연약한 인류의 현실을 극적으로 변화시키는 현상이 신자의 간절한 소망이자 기독교 영성의 정점임을 고려하면, 히스기야는 과학이 고도로 발전한 21세기에서조차 신자의 표상으로 불러도 손색없는 인물이다.

그러나 조금 더 시야를 확대하면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와 복이라고 극찬받는 히스기야의 생명 연장 사건은 전혀 다른 의미로 다가온다.

히스기야의 아들이자 아버지와 완전히 다른 부정적 이미지로 각인된 므낫세의 탄생이 히스기야의 생명 연장과 필연적인 연관성을 지니는 탓이다.

즉 12세에 왕의 자리에 올라 무려 55년을 통치하며 온갖 악행을 저지른 인물로 묘사되는 므낫세는 하나님이 히스기야의 생명을 구제한 결과로 세상에 등장했음을 뜻한다.

만일 하나님이 히스기야의 목숨을 살리지 않았다면, 므낫세의 탄생과 이스라엘의 죄악은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고 또 다른 형태의 역사가 전개되었을지 모른다는 아쉬움이 진하게 스며드는 대목이다.

이런 의구심을 해소하기 위해 므낫세의 등장을 신앙적 교훈을 위한 하나님의 큰 그림이라고 해석하는 시각이 있다. 그러나 이와 같은 방법론은 백성들의 억울한 희생을 간과한 단견인 동시에 기독교 신앙의 본질을 훼손하는 이차 가해이다.

가르침을 줄 목적으로 하나님이 수많은 인명을 무고하게 희생시켰다는 논리는 하나님을 악용하여 일방적인 자기방어기재를 강화하는 강자들의 변명으로 악용되기 쉽고, 맹목적이고 무분별한 악행을 정당화하는 무서운 결과를 초래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왜곡된 맹신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앞세운 무수한 전쟁과 폭력이 유래했으며, 교회의 궁극적 목적에 관한 오해를 일으키는 악재로 지금껏 작용하고 있다.

백신 접종으로 인해 진정세에 접어들 것으로 기대되는 2021년 3월의 특정한 시공 속에서, 히스기야와 므낫세에서 얻은 학습 결과를 되새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부정확한 성경 해석과 악의적인 신앙적 판단에 따른 흑백논리와 과잉 일반화는 소수 몇 사람뿐 아니라 인류 전체에게 비극적 결과를 일으킬 소지가 다분한 까닭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히스기야가 누린 장수(長壽)의 복을 하나님의 무한한 복으로만 해석하며 조건 없는 부러움의 대상으로 삼아서는 안 된다.

그렇다고 므낫세의 치세와 연결한 편견에 과도하게 기대어, 방어 능력이 상대적으로 떨어지는 피해자들에 대하여 무작정 비판으로 일관하는 자세도 엄격히 지양해야 한다.

그런 매몰찬 자세는 상처와 고통 속에 신음하는 사회적 약자들을 향한 애정을 해체하는 한편, 편파적 교리와 신조 등의 절대화를 통해 교회와 사회의 상호관계를 파괴하는 도화선으로 작용할 공산이 크기 때문이다.

신앙공동체는 학습을 추구하는 학교가 아니며, 이윤을 극대화하기 위해 애쓰는 기업도 아니다.

또 시시비비에 목숨을 거는 법원도 아니고, 공리주의적 정책을 실행하는 정부도 아니다.

교회는 교회로서 존재할 본래 목적과 사명을 잊지 말아야 하며, 그 원칙이 전 세계적인 재앙 이후에 첫 번째로 기억할 기독교의 기준이 되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올해 사순절은 각별한 의미와 가치를 지닌다.

예수 그리스도가 최초의 사순절에 스스로 생명을 포기함으로써 인류 구원을 위한 문호를 개방한 것처럼, 오늘날의 성도 역시 이 사순절에 자기중심적인 신앙생활의 민낯을 벗고 그리스도의 정신을 본받을 절호의 기회를 접했기 때문이다.

성급한 말이지만, 교회는 코로나19 이후 시대를 준비해야 한다. 그리고 그 과정의 선결 조건이 이기적 분석이 아니라 희생과 섬김이라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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