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호(제 1264호) 한국성결신문 「애오개」에 대해서 어느 은퇴 목사님이 정의(情誼)를 생각해 한마디를 남기고자 한다며 전화를 주셨다. 말씀인 즉, “지방회장, 부회장은 경력에 따라 절로 감당하게 되는 자리인데, 우리 교단이 남녀성평등 의식에서 무슨 획기적인 전환점이라도 마련한 것처럼 호들갑을 떠는 것은 일종의 ‘가짜뉴스’ 아니냐?”는 것이었다. 이어서 물으셨다. “예수님을 사랑한 무리 중에 가장 억울한 대접을 받는 사람은 누구이겠느냐?”고.

▨… 머리통 어딘가쯤에 자리하고 있을 기억의 창고를 샅샅이 헤집었다. 복음서의 이름들을 들쑤셔대다가 “예수 주변의 여인들”(E.M.벤델)에게 소환장을 발부했다. 십자가 사건 이후 2000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아직도 주님을 향한 진정성을 제대로 인정받지 못해 오해의 덫에 갇혀 있는 사람이 행여 있을까 궁금했고 자신의 성서이해가 부족해서 성서의 인물을 오해하고 있지는 않은지 점검의 필요성이 회초리로 다가왔기 때문이었다.

▨… 머리통 밑바닥 케케묵은 먼지를 털어내자 피오렌자(E.S.Fiorenza)의 한마디가 선명하게 그 모습을 들어냈다. “여성이 되는 것과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은 다른 한쪽을 배제하면서 해결해야 할 본래적인 모순인가?”(김순영, 여성신학적 성서해석방법론) 이 모순을 처절할 만큼 강요당해 오해를 겹으로 받았던 여인이 막달라 마리아였다고 한다면 그 또한 그녀를 오해하는 단초를 제공하는 것은 아닌지, 두려워졌다.

▨… 막달라 마리아는 일곱 사귀에 들렸었으나 예수님께 고침을 받고 그를 따르게 되었다. 그녀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끝까지 지켰으며 그 시신에 바를 향료를 준비하여 새벽에 다른 제자들 보다 먼저 무덤에 가서 부활의 주님을 만나고 대화하였으며 이 사실을 제자들에게 알렸다. 예수님을 향한 막달라 마리아의 헌신을 그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것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은(대표적으로 아우구스티누스) “성령은 막달라 마리아를 사도 중의 사도로 만들었다”고 고백한다.

▨… 그러나 그녀의 여성성에만 시선을 고정시키는 사람들은(대표적으로 카잔차키스) 남성 예수를 유혹하는 여인으로 색칠해버린다. 중세 후기의 막달라 마리아 상에는 아름답기는 하나 반라로 가슴을 거의 드러낸 것도 있다. 올해의 사순절에는 여성 성결인들만이라도 막달라 마리아에 대한 오해를 씻도록 하자. 억울한 누명을 벗겨주어 사도 중의 사도로 제 자리를 찾게 하자. 그래야 여성사도를 말할 수 있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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