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성결교회의 정주(定住)선교사이며 초대 감독, 초대 성서학원 원장 존 토마스는 무교정 전도관에 이어지고 있는 성경공부반을 기반으로 임시 성서학원을 시작하여(1911년 3월) 공식적인 경성 성서학원을 설립하였습니다.

1920년 여름에는 성서학원의 건축이 시작되었고 1921년 3월, 아현동 언덕에 신축교사가 완공되었습니다.

이후 서울신학대학교로 발전하여 1974년 부천으로 이전한 후에도 2010년 철거될 때까지 성결과 거룩을 상징하는 H자(字) 모양의 이 건축물은 교단의 역사적 상징으로, 목회자들에게 꿈과 희망을 길러왔던 추억의 동산으로 존재하였습니다.

옛 건물에서 표정과 사연을 담은 유일한 역사적 유물은 90년을 넘어 100년을 견뎌온 머릿돌이 남았습니다.

가로로 다듬어진 대리석에는 네 줄로 THE ORIENTAL/MISSIONARY SOCIETY / B. T. I.  1920 / 東洋宣敎會聖書學院 라는 내용이 음각되어 있습니다.

그중 ‘B, T. I’라는 문자가 생소하였습니다. 그래서 새삼 교단의 초기 역사를 살펴보았고 이것이 초기 성서학원을 지칭하는 ‘Bible Traing Institute’의 약자(略字)인 것을 알았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교단의 초기 지도자들은 교단의 사역자를 양성하는 성서학원의 정체성을 ‘훈련원’으로, 오직 ‘성경’을 배우는 목표와 이유로 하였습니다.

조선 최초의 민족대학(1906)인 숭실대학이 장로교와 감리교 선교부가 합동으로 학교경영에 참여하여 ‘합성’숭실(合成崇實 Union Christian College)이 세워졌습니다.

이후 미국 남·북 감리교회 선교부가 ‘연합’하여(1907) 협성신학교(協成神學校 The Union Theological School)를, 구세군에서(1910) 성경대학(Training Garrison)을, 아더 T. 피어선(Arthur T. Pierson)의 ‘유지’와 유산으로 북장로회와 남·북 감리교 선교부가 연합하여(1912) 피어선 기념성경학원(The Pierson Memorial Bible School)을 설립하였습니다.

조선 선교의 역사적 향방을 결정하는 신학교의 이름을 짓는 일은 선교사들과 토착교회 지도자들 모두에게 많은 기도와 고민의 과정, 그리고 토론과 합의가 필요했을 것입니다.

철학적 사유를 도입한 학문탐구와 존재 자체에 질문을 던지는 여유로운 사색으로 상아탑이란 냉소적 시선을 받던 학교(School)란 이름, 공동체 생활과 전공 단위의 수업으로 전문인 양성을 강조하는 단과대학(College), 씨앗을 뿌려 어린나무를 길러내는 모판(苗圃 Seminary)으로 할 것인지, 구세군은 요새(要塞 Garrison)란 이름도 썼는데......  성서학원은 이 모든 가능성을 접어두고 장인(匠人)으로부터 도제(徒弟)교육을 통해 오직 한 가지만 전수하는 관계적 과정을 뜻하는 인스티튜트를 선택하였습니다.

현대사회에서 오직 축구만 연구하고 훈련하는 사커 인스티튜트, 언어훈련과 문화학습을 하되 오직 독일만 배우는 독일 문화원이 괴테 인스티튜트이듯 말입니다.

‘오직 그 책, 한 권의 사람(homo unius libri)’이 되기를 소원한 웨슬리의 후예로 성서학원(B.T.I.)은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미 철학의 틀로 하나님을 사유(思惟)하는 신학(Theological), 대량생산의 모판(seminary)을 넘어 신학교가 되었고(S.T.S.) 근대산업을 뒷받침하는 지식을 분배받음으로 사회의 지도적 위치를 차지하는 교수와 학생의 학문조합(UNIVERSITAS)된 서울신학대학교(S.T.U)는 어느덧 110주년(2021.3.14.)을 맞게 됩니다.

서울신학대학교는 이제라도 성서학원의 정체성을 다시 확인하고 오직 성경, 훈련, 선택과 집중, 사명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성결교회는 선교사가 세워 우리에게 맡겨준 훈련소를 통해 성서적 성결의 체험과 사중복음을 전하는 일에 오롯이 헌신할 훈련생들을 위해 먹이고 입히고 기도로 지킬 사명감을 회복해야 합니다.

외국인의 지원으로 세운 학교가 아니라 우리가 지켜야 할 학교인 것을 각성하여 <B.T.I.> 정체성을 회복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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