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코로나가 극성을 부리는 요즈음 은퇴한지도 한참이 되는 어느 노(老)목사님이 주일 아침 강단에 서서 성경 본문을 봉독한 후에 먼저 고백하셨다. “어제 어느 할머니 권사님의 전화를 받았습니다. 내일 주일에 예배드리러 가도 될까요? 라고 묻는…” 그리고는 말을 잇지 못한 채 잠시 멍하니 서서 많지 않은 교인들과 눈을 맞추었다. 마치 그 할머니 권사님을 그 자리에서 찾아내려는 듯한 모습으로.

▨… 어색한 침묵이 예배실을 가득 채웠을 때 마침내 노목사님이 말을 이었다. “제가 그 권사님이 예배드리러 오겠다는걸, 오시지 말라고 막았습니다. 제가 그렇게 하고도 오늘 강단에 섰습니다. 하나님께, 여러 성도님들에게 먼저 용서를 구하고 싶습니다. 저는 지금 예배드리러 오는 분을 오시지 말도록 막는 목사도 목사인지를 저 자신에게 묻고 있습니다. 또 여러분에게도 묻고자 합니다.” 바윗덩이 같은 침묵이 예배실을 짓눌러 목사도, 회중도 모두 입을 다물고 있었다.

▨… 예배실 정원(?)의 십분의 일만 모이는 것을 일러 ‘사회적 거리 두기’라고 하는가. 잘 조작할 줄도 모르는 핸드폰을 가지고 예배드리느니 비록, 남의 교회 예배이지만 화면의 크기가 넉넉한 TV를 켜고 예배를 드리면 안되는 것이냐고 묻는 노인들이 있다. 이 노인들에게 영상예배가 코로나시대의 무이한 예배 방법이라고 제시하는 것이 해결책이 될 수 있을까. 교회공동체의 소속감을 전혀 고집하지 않고서도 교회는 해야 할 일을 다 할 수 있을까.

▨… 코로나의 위력은 우리의 일상을 파괴하였을 뿐만 아니라 우리의 믿음의 뿌리까지 흔들어 놓았다. 소소한 일상의 삶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가를 깨우쳐 주기도 했지만, 신앙이 우리의 삶의 기반이 되어야 한다고 외치면서도 예배참석 인원을 조절해야 하는 모순을 감내하게끔 만들어 주기도 했다. 도대체 언제쯤이면 이 사태가 끝날 수 있을까. 언제쯤이면 오순도순 모여 찬송하고 기도하며 예배드릴 수 있을까.

▨… 하이데거(M.Heidegger)의 인간 이해를 빌린다면, 인간 실존은 ‘세계 내적 존재’이다. 인간은 ‘세계 안에’ 있으면서 이 ‘세계와 함께’ 살아가지만 동시에 이 세계와 자신을 구별하면서 살아간다. 코로나의 굴레가 이 시대와 사람들을 모두 삼켜버린다고 하더라도 우리 그리스도의 사람들은 신앙을 삶의 기반으로 삼아 본래적 인간의 삶을 주장하고 선포해야하지 않을까. 목사가 교인에게 예배에 나오지 말도록 권면하는 말도 안 되는 일만은 피할 수 있도록 길을 터줄 수는 없는 것인가를 묻는 목회자들의 답답한 가슴은 뉘 있어 알아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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