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이 이해되지 않을 때

       이성훈 목사

도저히 이해되지 않는 일들이 어느 날 갑자기 내 주변에서 일어날 때 우리는 하나님의 존재를 의심하며 고통스러워 합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어느 날 갑자기 암 선고를 받기도 하고, 남편의 외도로 인하여 평안하던 가정에 폭풍우가 몰아치기도 하며, 내 자녀가 온갖 폭언과 협박에 시달리기도 합니다.

장엄한 창세기 서두의 천지창조와는 달리 창세기의 마지막은 갑자기 요셉의 죽음과 그를 입관하는 장면으로 끝이 납니다. 마치 미완성 교향곡처럼 무척 낯설게 느껴지는 장면입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매우 중요한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요셉은 죽을 때 그의 형제들에게 “하나님이 당신들을 돌보시리니 ‘나[요셉]의 해골’ (히.아쯔모타이)을 메고 올라가겠다고 하라”(창 50:25)고 당부합니다.

그냥 흘려 들을 수 있는 말일 수 있으나, 그의 유언이 결코 평범하지 않습니다. 요셉이 ‘나의 해골’이라고 하였을 때 이 말은 히브리어의 ‘아쯔모타이’를 번역한 말입니다. ‘아쯔모트’와 ‘이’가 합쳐져서 ‘나의 뼈들’이라는 의미로서, NIV는 ‘my bones’라고 읽었습니다.

이 말을 조금 더 자연스럽게 뉘앙스를 살려서 읽는다면 “하나님이 이제 너희를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실 것이니 그 때에 내 뼛조각 하나 [이곳에] 남기지 말고 메고 올라가라”는 말입니다.

요셉은 이미 애굽 이민 1세대로서 그 당시에는 상당한 위치에 올랐던 사람입니다. 바로의 죽음을 위해서는 72일을 애곡하였던 반면, 요셉의 아버지 야곱이 죽었을 때 그를 위해서 사람들이 70일을 애곡한 것을 보면 그가 애굽 내에서 어떤 위치를 차지했는지 충분히 상상이 갑니다.

요셉이 원하기만 하면 시신매장을 위한 최고의 명당자리를 얼마든지 차지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더욱이 애굽의 시신보존처리법은 타의추종을 불허할만큼 대단했습니다. 누구든지 자신의 장례를 애굽에 맡기는 것은 성공과 부의 상징으로 여겼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셉은 ‘[애굽 땅에] 자신의 뼛조각 하나 남기지 말’라며 강력한 어조로 마지막 유언을 남겼습니다. 사람이 마지막으로 남기는 말에는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아무 말이나 하지 않습니다. 당연히 요셉의 가족들은 그의 유언을 주의 깊게 들었던 이유는 단순히 유언이기 때문만이 아니라, 그의 어조는 비장하기까지 했기 때문입니다.

이 뿐 아닙니다. 요셉은 자신의 유언을 반복하여 형제들에게 말했습니다. 모세가 요셉의 유골을 취하면서 요셉이 형제들에게 “단단히 맹세를 시켰다”고 말할 때, 원문에는 ‘단단히’에 해당하는 부사가 없습니다. 대신 “맹세시켰다”는 말을 2번이나 반복하였습니다. 그만큼 그의 뼈만이라도 가나안으로 가고자 하는 그의 열망은 비장했습니다.

이는 300년이 훨씬 지나서 장정만 60만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움직이는 출애굽의 상황에서 모세가 요셉의 유언을 잊지 않고 그의 유골을 챙긴 이유였을 것입니다.

비록 창세기는 요셉의 죽음과 더불어 그를 입관하는 것으로 끝이 나지만 요셉은 자신의 죽음을 앞두고 자신의 “뼛조각 하나 남기지 말고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게 하라”는 유언은 하나님의 장엄한 출애굽 사건의 마중물이었습니다.

우리 삶에서 도저히 이해되지 않는 일들이 누구에게든지 일어날 수 있습니다. 도저히 내 삶이 해석되지 않을지라도 우리의 삶이 하나님의 손에 있을 때 놀라운 걸작품이었음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손에 붙잡힌 삶은 위대한 그 분의 섭리를 이루는 마중물이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신실하십니다. 그것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바울은 이러한 하나님의 신실함에 대해서 “모든 것이 협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 8:28)고 표현했습니다.

이해되지 않는 상황과 삶이 전개되고 있습니까? 오직 한 분이신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반드시 신뢰하십시오. 당신의 삶은 그 분의 손에 붙잡힐 때 기대하지 않았던 신비한 하나님의 역사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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