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거 봐요, 댁에 같은 훤출한 내 신랑감들은 제 입에 풀칠두 못해서 떠돌아다니는데, 내가 어떻게 살림을 살겠냐구.” 1980년대 초반의 서울신학대학교 어느 강의실에서는 신학강의시간이었음에도 생뚱맞게 황석영의 「삼포가는 길」이 강의자와 학생들 사이에 논쟁의 쟁점을 제공하고 있었다. 삼포가는 길의 작부 ‘백화’의 삶을 ‘죄인의 삶’으로만 규정해도 무방한가라고 아직은 젊은 강의자가 학생들을 향해 질문을 던졌기 때문이었다.

▨… 강의자는 아마도 급격한 산업화와 도시화에 내몰려 돌아갈 마음의 고향을 잃어버린 채 유랑하는 노동자와 작부로 전락한 농어촌 소녀를 통해 자본주의가 최고의 가치로 추앙되는 ‘조국근대화’의 부정적 단면을 소개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이 근대화에서 소외된 이들의 삶의 행태가 윤리적으로 다소 부정적인 것이라 하더라도 앞뒤를 자른 채 죄라고만 비난한다면 그리스도교의 죄 이해는 너무 옹졸하지 않느냐는 것이었다.

▨… 그 강의실의 신학생이 중견목회자가 되어 신년 인사의 자리에서 그 강의자에게 물었다. “심방을 전화로만 하는데 예배드리러 교회에 오라는 말을 할 수가 없습니다. 휴대폰 영상으로 예배드리고 교회에는 오지 마십시오라고 권면하는 것이 목회자의 바른 도리일까요?” 그 목회자는, 예배는 하나님과의 만남인데 영상예배가 진정한 예배가 될 수 있다면 세상의 모든 교회는 문을 닫아도 되지 않겠느냐고 자조 섞인 질문도 이어서 던졌다.

▨… 목회자도 사람이다. 자기모순의 굴레는 목회자들의 영원한 십자가일런지도 모른다. 소외라는 측면에서 ‘백화’같기만 한 작은교회의 목회자는 ‘훤칠한’ 신랑감 같은 교회를 탐낼 능력이 없기에 교회오는데 코로나는 왜 걱정하느냐고 묻지는 못하고 “죄는 용서 받았으나 우리는 의인이며 동시에 죄인”이라고 루터만 따라 되뇌일 뿐이었다.

▨… 코로나19의 바람은 한국교회를 뿌리에서부터 뒤흔들고 있다. 그 바람의 세기는 「종의 기원」이나 「눈먼 시계공」이 출간되었을 때의 바람보다 더 강하다. 한국교회가 이 바람을 영상예배로 잠재우려는 것은 ‘실험실의 코끼리’를 외면하려는 것과 무슨 차이가 있는가. 작은교회들의 신음소리를 듣고 있다면 사회적 거리두기가 완화되는 이때에 교회 살리기 대책에 더 과감해야 하지 않겠는가. 1970년대가 변화를 수용하지 못한 사람들의 소외의 시대였다면 지금은 작은교회들이 소외당하는 시대다. 이 문제도 실험실의 코끼리일 수밖에 없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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