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큰 문제는 문제를 제기할 여유도 없이 디지털 예배가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주님의 재림을 연습하듯, 어느 날 갑자기 코로나로 인해 대면예배를 비대면예배로 전면 전환해야 했다. 디지털예배에 우려되고 있는 성도들의 체현, 참석, 능동적 참여 등의 다양한 문제에 천착할 시간이 주어지지 않았다. 

한 공간에 다 모일 수 없기 때문에 궁여지책으로 제시한 대형 TV로 드리는 예배에 대해서 달가워하지 않는 정도만큼만 생각하고 있었다. 

문제를 제기할 틈도 없이 디지털예배가 시작되었다는 것은 코로나19가 가져온 디지털예배 전환의 가장 중요한 가르침이다. 예배의 갱신과 전환이 반드시 절차적 정당성을 따져서 순차적으로 변화를 약속대로 가져오는 프로토콜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미 시작된, 디지털로 매개되는 예배의 실행들은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오프라인 교회 예배는 쇠퇴할 가능성이 크고, 온라인 교회 예배 실행은 확장되어 나갈 것이다.

최소한, 당분간은 온라인과 오프라인을 모두 포함하는 올 라인(All-line)예배로 가야 한다. 이전과 같은 오프라인 중심의 대면예배만 드리는 시대는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지금 디지털로 매개되는 말씀중심의 예배를 지나, 디지털로 매개되는 성례전 수행이라는 또 다른 산을 넘어야 한다. 

여기에는 오프라인의 물질성과 온라인의 물질성 사이의 상호작용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교회사적으로 물질에 대한 이해의 근거를 찾아야 한다. 디지털로 매개되는 실행들이 갖는 특정한 성격들을 살펴 보아야 한다.

모든 것을 이 짧은 지면에 다 논할 수는 없을 뿐 아니라, 단번에 모든 것을 다 해결해 주는 대답은 없다. 주어진 주제에 대한 적절한 질문을 던지고 답을 제시할 뿐이다. 온라인 성찬이 불가불 상황이라 할지라도 최소한의 근거는 유지했으면 한다. 

루터는 예수 그리스도의 편재성으로 성찬을 이해했다. 오늘날 언제 어디서나 존재한다는 뜻의 라틴어 유비쿼터스는 모든 사물을 네트워크로 연결하여 시간과 장소에 관계없이 다양하게 이용할 수 있게 하는 기술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권능에 한계를 둘 수 없기에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은혜의 매개를 제한할 수 없다. 인터넷이 설교 말씀을 전달하는 은혜의 수단으로 일상화되었듯이 성찬도 가능하다는 것이다. 

초대교회 변증가이자 순교자인 2세기의 유스티누스(JUSTIN MARTYR)는 주일예배에 여러 가지 이유로 출석하지 못한 사람들에게 성찬기도가 드려진 빵과 포도주를 부목사(Deacon)를 통해서 전달해 주었다. 성찬은 교회 안에서만 먹었던 것은 아니다. 교회 밖으로도 전달되었다.  

하지만 성찬을 임의대로 자신이 준비해서 먹을 수는 없다. 전쟁터와 선교지같은 예외적인 상황을 제외하고 지금 한국에서 원격 성찬의 거행은 두 가지를 지켰으며 한다. 

첫째, 예수께서 늘 그러셨듯이 성찬은 감사기도가 있어야 한다. 

둘째, 초대교회부터 성찬은 교회로부터 권위를 인정받은 목사만 집례 할 수 있기 때문에 원격으로 성찬을 집례 한다고 해도 사전에 목회자가 “주님의 살과 피입니다”라고 말하며 나눠 주어야 한다. 

방법은 가가호호 방문을 하든, 교회에 와서 받아가든 상관없다. 그러나 목회자가 교회에서 성찬을 위한 감사기도를 드린 후 가정에서 먹도록 지도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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