멸시하더라

       이성훈 목사

시간이 흘러도 자식이 생기지 않자 아브람은 하나님이 약속하신 상속자가 꼭 자신에게서 나오는 사람이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에 그는 하나님께 자신의 종 다메섹 사람 엘리에셀이 자신의 상속자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말합니다.

이 때 하나님은 다시 한 번 아브라함의 몸에서 날 자가 상속자가 될 것이라는 약속을 주셨습니다.(창 15:4)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식은 여전이 없었고, 사래는 자신의 여종 애굽 사람 하갈을 남편에게 첩으로 주었습니다.  

하갈은 곧 임신하였고, 지금까지의 태도를 바꾸어 여주인이었던 사래를 멸시했습니다.(히. 봐태칼 창 15:4) 아브람의 아기를 가지게 된 하갈은 아브람이 사래보다 자신을 더 사랑한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이는 아브람이 하갈과 동침했다고 할 때 ‘야다’(‘알다’ 창 4:1)나 혹은 ‘솨카브’(‘눕다’ 신 24:13; 룻 3:13)와 같은 통상적인 말이 아닌 ‘오다’ 혹은 ‘동거하다’라는 의미의 ‘보’를 사용하였다는 데서 힌트를 얻습니다.

아브람은 하갈과 함께 하는 시간이 많아졌습니다. 이는 하갈이 여주인 사래를 멸시하였던(히. 봐태칼 창 15:4) 이유였습니다. 하갈로부터 ‘멸시’(히. 봐태칼 창 15:4) 당하는 원인이 아브라함에게 있다고 생각한 사래는 아브람을 강력하게 비난했습니다 (창 16:5).

사래가 하갈로부터 ‘멸시하다’라고 번역한 히브리어 ‘봐태칼’ (창 15:4)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이 아브람에게 주셨던 약속을 떠올리게 합니다.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히.우메칼렐하 내가 저주하..』(창 12:3)겠다고 하셨습니다. 이 때 하나님이 ‘너를 저주하는 자’라고 번역한 히브리어 ‘우메칼렐하’와 하갈이 사래를 ‘모욕하다’라고 번역한 ‘봐태칼’의 뿌리가 동일한 ‘칼랄’이라는 동사이기 때문입니다.

창세기 12장에서 하나님이 아브라함에 주신 약속의 말씀 ‘너를 저주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는 말씀은 아브라함을 그만큼 축복하신다는 말씀일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이 다른 사람보다 아브람과 사래에게 적용이 되었습니다.

아브람과 사래는 하나님의 언약을 멸시하였기 때문입니다.(히.칼랄) 하나님은 분명히 아브람의 몸에서 날 자가 네 상속자(창 15:4)라고 하셨는데 사래는 세상의 관례와 방법을 끌어들여 하나님의 약속을 해석했습니다. 그러자 그들에게 돌아온 것은 그의 여종 하갈로부터 ‘멸시함’을 받는 (히. 칼랄) 어처구니 없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사래는 하갈을 통하여 하나님의 약속을 이루고자 하는 시도를 하지 말았어야 했습니다. 아브람은 비록 사래가 그런 방법을 사용하자고 했어도 하나님께 기도하자며 그녀의 손을 잡았어야 했습니다.

비록 사래의 방법이 비록 통상적인 사회적 관례였다고 해도 두 사람은 오직 하나님의 방법을 고집했어야 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살아가는 방법과 방식이 구별되어야 합니다.

사래는 하갈로부터 멸시(히.칼랄)를 받을 때 남편을 비방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말씀 앞에 무릎꿇고 “하나님 잘못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과 하나님의 말씀을 멸시했습니다(히. 칼랄)”라며 회개했어야 했습니다.

코로나19를 겪는 한국교회의 모습이 안타까워 견딜 수 없습니다. 마음이 아픕니다. 하갈이 사래를 모욕하는 모습 속에서 자꾸 한국 교회의 모습이 아른 거립니다.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나라와 민족을 섬겼던 한국교회에 무슨 원한이 있어서 사회가 저러는 것일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말씀 속에서 우리가 고통스럽더라도 끝까지 말씀을 붙들고 정도를 걸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을 깨닫습니다. 마음이 쓰리다 못해 갈기갈기 찢어집니다.

주님이 사랑하사 피 흘리신 몸 된 교회가 땅에 내평겨쳐져서 짓밟히는 모습에 너무 너무 마음이 아픕니다. 그러나 우리가 다시 주님께로 돌아가면 하나님은 반드시 우리를 회복하여 주실 것을 믿으며 오늘도 믿음의 길을 걸어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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