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개청(1529~1590)이 선조 임금에게 상소문을 올렸다. “전하께옵서 오늘날 하시는 바를 가지고 오늘날 하고자 하는 바를 구하려는 것은 참으로 이른바 북쪽으로 수레를 몰면서 남쪽 월나라로 가려는 격입니다. 결단코 뜻을 이룰 이치가 없으리이다.”(한글역:정민) 상소문을 쓴다는 것은 직위를 걸어야 하는 일이기도 하지만 때로는 목숨을 걸어야 하는 일이기도 했다. 조선왕조 시대의 역사가 이를 증언한다.

▨… 정개청은 몇 차례나 관직을 사양하다가 영의정 박순의 천거로 관직에 나갔다. 그러나 정여립의 모역사건 때 동모했다는 죄목으로 유배를 당하고 유배지에서 병이 깊어져 죽었다. 제수받은 벼슬도 곡성현감이라는 지방관직에 불과했지만 선조 임금에게 올린 상소문은 ‘아니요’가 분명한 서릿발 같았다. 그 서릿발은 정개청다움을 알렸지만 모역사건에 엮이는 빌미가 되기도 했다.

▨… 어느 작은교회의 목회자가 선배 목사에게 물었다. “코로나 때문에 교회마다 어려움을 겪고 있는 때에 청빙을 받았는데 수락해도 될까요?” 선배 목사가 정개청의 상소문같은 한마디를 던졌다. “수락하지 않으면, 다음에 후회하지 않을 자신은 있으신가?” 젊은 목사가 머뭇거리자 선배 목사가 말을 이었다. “교역자의 임지 이동에는 하나님의 뜻이 전제됨을 아직도 깨닫지 못하고 있으신가?”

▨… 젊은 목사는 코로나 때문에 예배를 드릴수도 없는 때 목회지를 떠나는 일이 하나님의 교회를 방기하는 것은 아닐까 두려웠던 것이다. 교인 모두가 힘들때 큰 교회로 이임하는 자신은, 같이 지기로 한 십자가를 포기하는 모습은 아닌지, 자신의 설교를 들었던 이들에게 묻고 싶었을 것이다. 더 큰 교회로의 임지 이동이 오른 뺨을 맞은 다음에 왼뺨을 내밀기 보다 더 엄혹한 명령이 될 수도 있음을 뼈아프게 느꼈으리라.

▨… 사회적 거리두기가 무엇인지, 모든 교회가 이 명령 하나에 흔들거릴 수 밖에 없을 때, 왜 하나님께서는 목회지 이동을 명령하시는지, 가처분 신청 같은 것으로 교단 행정을 사회법의 판결 아래 두려하시는지, 뉘있어 정개청의 상소문으로 하나님께 상소할 이 없는지 묻고 싶다. 오스카 와일드(1854~1900)가 섬쩍지근할 수도 있는 한마디를 남겼다. “인생은 한 번도 공평한 적이 없었다. 어쩌면, 그것은 우리 대다수에게는 행운인 건지도 모른다.” 와일드적인 행운을 ‘하나님의 뜻’으로 포장하는 일만은 하지 않도록 주님은 명령하시는 것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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