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의 노예해방인 ‘백정의 해방’

조선 팔천(八賤)이라는 말이 있다. 조선의 신분사회에서 가장 낮은 계급에 속한 자들을 일컫는 말이다.

노비, 백정, 상여꾼, 중, 기생, 무당, 광대, 공장(工匠)이 바로 그들이다. 이들은 조선 500년 내내 인간으로서의 기본 권리마저 박탈당했고, 멸시와 천대의 상징이 되었다.

이들 중에서도 특히 백정들은 조선사회의 속죄양이었다. 그들은 소나 돼지 등의 도살과 공급을 맡고 있었기에, 국가와 백성들의 실생활에 많은 도움을 끼치고 있었다. 그런데도 그들은 사회의 가장 밑바닥에서 짐승처럼 대우를 받으며 살아야 했다.

백정의 신분은 세습되었고, 그것을 벗어날 어떤 길도 없었다. 그들은 누구에게나 항상 존댓말을 사용해야 했고, 허리를 숙여 절해야 했다.

심지어 종들과 어린아이들에게도 그렇게 해야 했다. 그들은 정상적으로 걸을 수도 없었다. 허리를 구부리고 뛰어가듯이 껑충거리며 다녀야 했고, 허리를 숙이지 않으면 교수형을 면치 못했다. 그들은 상투를 틀수도 없고, 아들을 낳을 때까지 머리를 묶지도 못했다. 가락지도 끼지 못했고 망건도 두를 수 없었다.

장가 갈 때는 신랑은 말 대신에 소를 타야 했고, 신부는 가마 대신 널빤지 위에 앉아서 가야 했다. 그 운명은 죽음으로도 바뀔 수 없는 것이었다. 생사를 넘어 완전히 고착된 신분처럼 여겨졌던 것이다.

그런데 이런 사회구조에 변화가 일기 시작했다. 그 중심에는 기독교의 영향력이 자리했다. 기독교의 수용과 확장에 따라 의도하지 못했던 혁명적인 변화들이 곳곳에서 뒤따랐던 것이다. 백정의 신분해방은 그 대표적인 사례라 할 것이다.

이런 백정들의 신분 해방에 앞장섰던 인물이 박성춘이다. 박성춘은 곤당골 출신의 백정으로, 1894년 전염병에 걸려 죽을 위기에 처해 있었다. 그때 곤당골 교회와 학당을 맡고 있던 무어(Samuel F. Moore) 목사와 제중원 담당 의사였던 에비슨(Oliver R. Avison)의 도움으로 기사회생할 수 있었다.

특히 고종 황제의 주치의였던 에비슨의 방문 진료는 박성춘에게 큰 감동이었다. 인간 취급도 못 받던 백정을 위해 황제의 주치의가 친히 방문 진료를 해준 것은 상상조차 해보지 못한 일이었던 것이다.

이를 계기로 박성춘은 교회에 출석하기 시작했고, 1895년 초에는 무어 목사에게 세례까지 받게 되었다.

이후 박성춘은 무어 목사와 함께 백정의 신분해방 운동에 적극적으로 뛰어들었다. 그 결과, 1895년 4월에 박성춘은 백정들에 대한 차별대우를 개정해 달라는 내용의 청원서를 당국에 올릴 수 있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회답도 받게 되었다. “너희들의 요구를 허락하노라. 초림과 망건을 착용할 것이며, 평민과 똑같이 옷을 입어도 좋고, 다 동등한 권한을 허락하노라."

이에 대해, 백정신분해방운동의 전말을 알고 있는 백정 선교의 대부(大父)인 무어 선교사는 이렇게 적고 있다.

“미국의 흑인 노예들이 아브라함 링컨 대통령의 노예 해방 선언을 듣고 기뻐했던 모습은 이곳 한국의 백정들이 초립을 쓸 수 있도록 허락을 받은 것보다 덜 기뻤을 것으로 본다. 그들은 너무도 좋아서 낮이나 밤이나 가리지 않고 초립을 썼다는 사례도 있다."

이처럼 기독교는 우리나라의 고착된 사회구조를 변화시키는 강력한 촉진제로 작용했다. 신분제도 및 각종 구습(舊習)의 철폐, 인간 및 구조악의 변화와 개선을 통한 건강한 공동체의 구현은 기독교 복음의 진정성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복음의 진리는 결코 기득권의 유지를 옹호하거나 방어해 주지 않는다. 참된 복음은 건강한 구조를 위해 끊임없이 변화하고 움직이도록 촉구한다.

그런데 최근 한국교회 내에는 새로운 신분제도의 출현과 형성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들이 높다. 믿음의 선배들이 희생적 헌신을 통해 일구어놓은 유산들을 계승 발전시키려 하기보다 도리어 기득권 유지나 독점을 위해 쟁투하는 모습이 눈에 띠게 많아지고 있는 현실에 대한 예언자적 외침인 것 같다.

허명섭 박사(서울신대 겸임교수·시흥제일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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