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죄소

       이성훈 목사

코로나19로 사회 분위기가 많이 침체되어 있습니다. 사업과 직장에서 하는 일들이 전혀 예기치 못한 흘러가는 것을 바라보는 성도들의 마음은 상처와 힘겨움으로 시커멓게 멍이 들어가고 있습니다. 

그럴 때마다 ‘하나님의 선하시다는 것과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시는 분’이라는 설교를 통해 그들을 위로하곤 합니다. 성경이 이것을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속성이시기 때문입니다.

‘만군의 여호와’, ‘여호와 이레’, 엘 샤다이’와 같은 하나님을 표현하는 용어들 속에 하나님은 ‘구원 하시는 분’이심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이는 우리 주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이기도 합니다. 

언젠가 여름수련회 때 숲 속에서 천로역정 여정 프로그램에서 깊은 숲 속에서 붙여놓은 화살표와 이정표를 보고 여정에 대한 도움을 받았던 것이 생각납니다. 마찬가지로 성경에는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시려는 그 분의 의도를 나타내기 위해 많은 상징적인 용어들과 언어 장치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 중에서 ‘카파르’(덮다)는 하나님의 구원하심을 우리에게 보여 주는 꽤 자주 반복되는 이정표와 같은 용어입니다. 이를 테면, 노아의 방주에서 ‘카파르’는 역청으로 번역을 하여 사용하였습니다. 

하나님은 노아에게 “방주 안에 칸들을 막고 역청을 그 안팎에 칠하라”고 하였는데, “역청을 칠하라”에서 ‘역청’과 ‘칠하라’는 2가지 용어 모두 어원(語原)이 ‘카파르’(덮다)로 동일합니다.

물론 창세기에서 말하는 ‘역청’이 우리가 알고 있는 그 역청과는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만, 창세기에서 말하는 ‘역청’이 무엇이든 간에 ‘코페르’(역청 창 6:14)는 ‘물이 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방지함으로써 목숨을 위태롭게 할 수 있는 상황으로부터 보호’하는 역할을 하였습니다. 

그래서 창세기 6장 14절을 직역하자면 “방주 안에 칸들을 막고 덮는 것(역청, 히. 코페르)을 그 안팎에서 덮어 버리라(칠하라, 히. 카파르)”고 할 수 있습니다. 즉 ‘덮는다’에 해당하는 ‘카파르’를 반복하였습니다.

방주가 구원을 상징한다고 한다면 구원을 무용지물로 만들 수 있는 바닷물이 배 안에 들어오는 것을 막아주는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이는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과도 일맥상통합니다. 

우리가 죄를 지음으로 우리는 마귀의 자녀가 되어 마귀의 영향력 아래 놓였었으나,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피는 이 영향력을 막아버리고 하나님의 구원으로 인도하는 길을 놓아 주셨습니다.

놀랍게도 레위기에서는 ‘카파르’를 ‘속죄’라고 번역이 되고 있는데, 성막에서도 이 용어가 매우 의미심장하게 사용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우선 성막은 ‘성소’와 ‘지성소’로 나눕니다. 그리고 지성소 안에는 ‘언약궤’라고도 불리워지는 ‘법궤’가 있으며, 그 안에는 ‘십계명’, ‘만나를 담은 항아리’, 그리고 ‘아론의 싹난 지팡이’가 담겨 있습니다. 그리고 법궤는 다시 세 부분으로 나뉘어지는데, ‘법궤’(히.아론), ‘속죄소’(히. 카포레트) 그리고 ‘속죄소’ 위에 위치한 ‘그룹들’ (히.케루빔)입니다. 

‘그룹들’(히.케루빔)은 날개를 가진 인간의 형상으로 되어 있는데, 천사를 연상케 합니다. 그리고 법궤와 ‘케루빔’사이에 ‘속죄소’ (히.카포레트)가 있는데 ‘속죄소’란 쉽게 말해서 ‘법궤를 덮는 뚜껑’입니다. 그래서 NIV는 속죄소를 Atonement Cover라고 번역하기도 했습니다. 

참으로 흥미로운 사실은 ‘속죄소’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카포레트’ 역시 ‘카파르’(‘덮다’)를 어원(語原)으로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는 법궤가 ‘왜 회막에 있어야 하는가’와 또 ‘회막의 역할이 구체적으로 상징하는 바가 무엇인가’ 하는 것을 알려 주기에 충분합니다. 

그렇습니다. 설명이 지면관계로 제약을 받기는 합니다만, 분명한 사실은 성경은 하나님의 구원에 관한 섭리와 용어들로 가득 차 있다는 것입니다. 마치 하나님이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구원! 구원! 구원!”이라고 외치시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이 그토록 원하시고 바라시는 주제이기도 합니다. 이는 주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이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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