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말론적인 샬롬이란?

            홍성철 박사

우리는 만날 때와 헤어질 때 ‘안녕하세요,’ ‘안녕히 가세요’라고 인사한다. 유대인은 만날 때와 헤어질 때 인사하면서 샬롬 한다. 그래서인지 창세기에는 샬롬이 ‘안녕’으로 번역된 곳이 있다.(창 43:27) 히브리 성경의 샬롬이 한글성경에서는 ‘안녕’ 외에도 ‘평안’(창 15:15), ‘평강’(민 6:26), ‘평화’(레 26:6), ‘화평’(시 37:37), ‘태평’(대하 20:30), ‘안부’(창 43:27) 등으로 번역되었다. 

이처럼 7가지로 번역된 샬롬의 가장 근본적인 뜻은 ‘평화’이다. 그런데 진정한 평화를 누리기 위해서는 하나님과의 관계는 물론 타인과의 관계도 완전해야 된다. 그뿐 아니라 건강과 경제도 완전해야 하고, 주변의 환경도 완전해야 한다. 그런 이유 때문에 샬롬은 ‘완전’을 뜻하기도 하는데, 그와 유사한 ‘건전,’ ‘복지,’ ‘조화’ 등의 뜻도 갖는다. 

구약성경에서 237번이나 나오는 샬롬을 애굽에서 해방된 유대인들은 약속의 땅 가나안에서 누리리라고 기대했다. 실제로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 평화에 대한 약속을 주신 바 있었다.(레 26:6~7)

그러나 유대인들은 가나안에서도 샬롬을 온전히 경험하지 못했다. 평화의 상징인 다윗과 솔로몬의 시대에도 끊임없는 전쟁과 건축으로 샬롬은 멀기만 했다. 더군다나 나라가 바벨론에게 멸망당하자 유대인들이 경험한 것은 샬롬이 아니라, 그 반대로 고난과 저주였다. 그러면서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약속인 샬롬이 현재적인 것이라기보다는 종말론적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선지자 이사야는 그 깨달음을 이렇게 표현했다; “마침내 위에서부터 영을 우리에게 부어 주시리니, 광야가 아름다운 밭이 되며 아름다운 밭을 숲으로 여기게 되리라.

그 때에 정의가 광야에 거하며 공의가 아름다운 밭에 거하리니, 공의의 열매는 화평이요 공의의 결과는 영원한 평안과 안전이라”(사 32:15~17) 이 말씀에 의하면 성령의 강림은 마지막 때의 현상이며, 그때야 비로소 화평과 평안, 곧 샬롬이 경험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유대인들은 언제 성령의 강림을 경험하여 샬롬을 누리게 되는가? 오순절에 성령이 임하셨지만, 유대인들 대부분은 그 성령을 거부했다. 

물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거듭난 그리스도인들은 성령의 내주를 경험했지만, 그래도 그 경험은 제한적이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변화하는 외적 환경과 내적 갈등 때문에 시시때때로 샬롬을 누리지 못한다. 그렇다면 언제 그리스도인들과 유대인들은 제한 없는 샬롬을 누리게 되는가? 그것은 그리스도가 ‘만왕의 왕’으로 통치하실 천년왕국에서이다. 

이스라엘 백성이 마침내 그들이 십자가에 못 박은 예수 그리스도가 그들의 메시야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내가 다윗의 집과 예루살렘 주민에게 은총과 간구하는 심령을 부어 주리니, 그들이 그 찌른 바 그를 바라보고 그를 위하여 애통하기를 독자를 위하여 애통하듯 하며 그를 위하여 통곡하기를 장자를 위하여 통곡하듯 하리로다”(슥 12:10) 

그들이 그렇게 회개하면서 메시야를 받아들이자 예수 그리스도는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로 세상에 오신다. 그리고 세상을 통치하시는데, 그것이 천년왕국의 시작이다. 그 천년왕국의 두드러진 특징 가운데 하나는 평강이다. 

마침내 ‘평강의 도시’의 뜻인 예루살렘에 제한 없는 평강이 찾아온 것이다. “사람이 그 가운데에 살며 다시는 저주가 있지 아니하리니 예루살렘이 평안히 서리로다”(슥 14:11) 마침내 천년왕국에서 예루살렘이 평화의 도시가 되어 샬롬이 넘칠 것이다. 
그런 이유 때문에 성경에서 약속된 평화는 종말론적인 샬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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