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성호 교수

지겨울 만큼 많은 이야기가 쏟아지다 보니 인류의 연대 구분조차 질병에 맞추자는 우스갯소리가 회자하고 있다. 그동안 일반적인 역사 기록 과정에서 예수 그리스도 탄생에 근거를 둔 BC(Before Christ)와 AD(Anno Domini) 개념이 통용되었다면, 이제부터 전개되는 미래사회는 BC(Before Corona)와 AD(After Disease)라는 재해석을 적용하자는 주장이 그중 하나다. 

한편으로는 오직 교회만을 강조하는 무지하고 무리한 이분법적 세계관에 경종을 울리는 순기능에 어느 정도 공감하지만 기독교인에게 가장 고귀한 신앙의 대상을 몹쓸 질병과 비교하는 세속적 가치관을 절감할 수 있는 탓에 다소 씁쓸한 자격지심을 지울 수 없다.

사실 특정한 숫자와 사건을 토대로 전개된 역사 이해는 간결하고 명료한 방식에 따른 이점이 적지 않다, 과거를 일목요연하게 판단할 수 있는 명확한 기준을 활용하여 오랫동안 전개된 인류의 삶을 편안하게 재단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조금만 눈여겨보면 현존하는 사람들의 실제 생애는 매우 복잡한 역동성으로 얽혀 있기에 단순한 시대 구분방식은 의외로 많은 허점을 지닌다. 

그런 이유로 거시적/미시적 안목이나 통시적/공시적 입장 등의 구분을 거쳐 허술한 방법론의 모자란 점을 보완하기도 한다. 물론 모든 양식을 동원하더라도 사람들이 살아가는 일상의 모든 요소의 완벽한 복원은 불가능하다는 점을 전제하며 진행되는 일들이다. 
이처럼 누구나 동의하는 완전한 결론은 상상 속에만 존재한다는 판단에 의지하여 작금의 상황에 ‘경건’이라는 낡은 잣대를 다시 들이대고 싶다. 십자군 전쟁 이후 기근과 전염병이 창궐하고 가톨릭교회의 교권주의가 정점에 달했던 시점에 등장한 ‘근대적 경건’(Devotio Moderna), 그리고 종교개혁의 기치가 희석되고 30년 전쟁의 비극이 연약한 시민들의 희망을 뿌리째 뽑았을 때 나타난 ‘경건주의’(Pietism)의 기억이 오늘날에도 적용 가능하다고 믿는 까닭이다. 
그렇다고 과학과 기술의 비약적 발전과 문화와 문명의 가파른 진보를 무작정 부정하지는 않는다. 다만 절망의 막바지에 다다를수록 궁극적인 신앙의 대상을 지향하는 인간 본성이 여전히 효력을 발휘하는 보편적이고 불변하는 진리라는 소견을 붙들고 싶을 따름이다. 절박하고 극단적 현실이 믿음을 혁신하는 동기와 동력으로 자리매김하는 현상을 흔히 접할 수 있어서일까? 
라틴어 ‘Pietas’로부터 유래한 ‘경건’(piety)은 ‘순수한’(pure), ‘친절한’(pius), ‘연민을 느끼는’(pity) 등의 맑고 긍정적인 감성을 표현하는 한편, ‘의무를 다하는’(dutiful) 또는 ‘신실한’(loyal) 등의 공적인 정서를 나타내기도 한다. 특히 ‘경건’의 기원이 부모와 자녀 사이의 관계로부터 시작되었다는 견해가 유력한 것으로 볼 때, 인력으로 나눌 수 없는 천륜(天倫)과 효심(孝心)을 상징하는 동시에 그런 사적 심정을 공적으로 확대한 표현을 명시한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하나님과 신자 사이의 ‘경건’은 인력으로 끊을 수 없는 필연적인 상호 연관성을 암시하는 한편, 사회적 존재로 실존하는 인간의 존재론적 조건이라는 결론을 유추할 수 있다. 힘들고 어려운 일이 밀어닥치면 비로소 생각나는 부모의 품처럼, ‘경건’은 신앙 여부를 떠나 하나님께로 회귀하고자 희망하는 인류의 근본적인 본질이며 삶의 핵심가치인 셈이다. 
그런 면에서 질병이 기독교 신앙을 삼킬 거라는 예상은 성급하고 어리석다. 막다른 절벽에 몰릴수록 사람은 본능적으로 하나님께 귀의하도록 창조되었으며, 형식의 다양성만 다를 뿐 역사는 그런 인간의 운명을 명확히 증명하기 때문이다. 질병에 지친 사람들은 어머니를 찾는 기분으로 하나님을 향해 시선을 돌릴 것이다. 이는 한국교회의 열악한 목회 상황과 별도로 사람들의 종교적 심성 자체는 강화될 거라는 예측을 뜻하며, 첨단 기술에 주목하는 방법론적 발상 외에 하나님과 교회에 기대하는 바를 기억하라는 당위성을 의미한다. 질병의 공포와 파괴력이 클수록, ‘경건’의 의미 역시 더 심오하고 진지한 해석을 요구할 터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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