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우스 신전과 파르테논 신전 그리고 그 신전의 주인공들인 제우스와 아테나를 건축하고 조각한 이는 고대 그리스의 피디아스(Phidias, B.C.491~430)로 알려져 있다. 피디아스는 페리클레스 시대 때 당대의 조각가, 석공들을 동원해 신전을 건축하고 신상들을 조각했다. 세계7대불가사의 중 하나로 꼽히는 제우스 신상은 높이가 13m나 되었고 정교한 아름다움의 아테나 여신상은 8m 정도의 높이라고 한다.

▨… 전후 15년 여에 걸친 장기간의 역사 때문이었을까. 아테나 여신상의 뒷 머리카락 한올 한올을 정성껏 다듬고 있는 피디아스에게 한 제자가 물었다. “선생님, 예술도 현실적이어야 하지 않습니까? 조각은 사람들에게 보이고자 하는 것인데 100피트 높이의 뒷머리카락이 보일까요. 누가 볼 것이라고 그렇게 정성을 들이세요?” 피디아스가 단칼로 그 질문을 잘랐다. “내가 보지 않는가?”

▨… 흔히들 목회자를 청빙하면서 이력서, 자기소개서, 목회계획서 등을 요구한다. 과거의 목회 실적을 검토해본다는 의도다. 그러나 냉정하게 평가하면 자기소개서는 자기미화라는 함정을 애초부터 지니고 있는 문장력 테스트의 시험이고 목회계획서는 실천가능성이나 교회의 형편 등이 배제된 채 하나님 나라의 실현을 장담하는 배짱의 나열 아니겠는가. 뉘 있어 피디아스처럼 “내가 보고 있다”고 단칼에 자를 수 있을까.

▨… 신자 몇 명, 교회재정 얼마 확대된 것으로 목사의 목회자됨이 평가되어진다면, 잃어버린 양 한 마리 때문에 광야로 나서는 목자는, 숫자의 개념도 없는, 정신착란증 환자에게나 비교되어야 할 비상식적 존재 아니겠는가. 우리 주님께서는 어쩌자고 이 자본주의 시대에서는 낙제자일 수 밖에 없는 목자를 참목자의 본보기로 제시하셨는지 여쭈어보고 싶다. 그러나 “내가 보고 있다”는 단칼의 답을 예상하지 못한다면 그는 성결인 목사가 아님에 틀림없다.

▨… “자기를 비우며 산다 대나무는 /몸 안에 자기가 없기에 /신神이 인자人子 되고 /인간의 종이 되어 /그처럼 사람들을 섬기고 /그처럼 사람들을 사랑했나보다 /나사렛 사람은 (하략, 대나무와 나사렛 예수류재하) 시인 목사께 물어볼까나. 자기를 비우며 사는 대나무를 알아보는 혜안이 신앙의 길 몇 년 쯤이면 떠질 수 있느냐고. 아니, 두 이레의 강아지만큼이라도 눈이 떠지면 대나무에서 나사렛 예수를 만날 수 있겠느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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