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의용 장로

누가복음 13장에는 “예수님께서 열매를 맺지 못하는 무화과 나무를 찍어버리라”고 말씀하시는 장면이 나온다. 이 말씀을 접할 때마다 정신이 확 난다. “나는 과연 그리스도인으로서 어떤 열매를 맺고 있는가?”

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으려면 뿌리가 튼튼해야 한다. 뿌리가 부실하면 아무리 수종이 좋아도 열매를 맺지 못한다.

그리스도인이 맺어야 할 열매는 무엇일까? 삶이라고 생각한다. 씨만 봐서는 무슨 나무의 씨인지 알 수 없지만, 열매를 보면 그 씨가 어떤 나무의 열매의 씨인지, 그 나무가 무슨 나무인지 알 수 있다.

씨나 나무의 이름은 열매로 짓는다. 포도가 열리면 포도나무요, 감이 열리면 감나무다. 그런 점에서 그리스도인이 맺어야 할 열매는 무엇인지… 그게 참 어렵다. 물론 성령의 9가지 열매가 제시돼 있지만 솔직히 9가지를 다 외기도 쉽지 않으니 그걸 삶으로 구현하기란 더 어려운 일이다.

세상에서 가장 먼 거리가 ‘앎’에서 ‘삶’까지가 아닐까 생각한다. 신앙은 앎을 삶으로 구현하는 과정이다. 아는 건 많은데 삶이 바뀌지 않는 건 잔뿌리만 많고 열매를 맺지 못하는 나무와 비슷하다는 생각이 든다. ‘앎’을 어떻게 ‘삶’으로 옮길 것인가. 우리 모두의 고민이 아닐 수 없다.

감히 성령의 9가지 열매를 관통하고 통합하는 개념이 없을까 고민하다가 찾아낸 단어가 ‘감사’이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살전 5:16~18)는 말씀이 감동을 준다.

그리고 깨달은 것이 있다. 고마워하는 마음은 내가 ‘채무자’임을 실감할 때 터져 나온다는 걸. 내가 당연한 ‘채권자’라는 생각을 하면 고마워하는 마음은 조금도 괴이지 않는다. 하나님으로부터, 이웃들로부터 내가 신세를 지고 있음을 깨달을 때 고마워하는 마음이 생겨나기 시작한다.

어떤 이는 매일 감사일기를 써서 쌓아놓기도 한다. 매일 감사일기를 쓰는 것는 정말 어려운 일이다. 늘 그렇게 한다는 건 정말 훌륭한 일이다. 그러나 이러한 감사는 한계가 있다. 남는 건 감사일기장일 뿐. 감사(感謝)는 고마움을 표현하는 일이다.

하나님과 다른 사람에게 그 마음을 표현할 때 진정한 감사가 된다. 그래야 상대방에게 감동, 기쁨이 된다. 고마운 일이 있을 때마다 그걸 기억해두었다가 자기 감사노트에 적기만 할 것이 아니라, 그때마다 그 고마움을 구체적인 언행으로 표현해야 열매가 된다. 

우리 교회의 감사운동은 추수감사절 때만 반짝 나타났다가 사라지고, 기껏 감사일기를 적는 단계를 넘어서지 못하고 있다.

감사일기는 자기가 받은 은혜를 적어놓은 장부일 뿐이다. 그거 적어서 쌓아놓는 건 언젠가 갚아야 할 외상장부나 마찬가지다. 감사일기 쓰는 단계를 넘어 그걸 표현하는 단계로 발전해야 한다. 적어도 하루에 열 번은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를 표현하면 좋겠다.

그리고 언제까지 외상장부 적으며 채무자로 살아갈 것인가. 채권자의 삶도 누려봐야 하지 않을까. 다른 사람이 내게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라고 할 수 있게 갚으며 베풀며 용서하며 살았으면 좋겠다. 내가 감사 인사를 하는 것보다 감사 인사를 받는 게 더 기쁘지 않은가? 그게 열매 맺는 삶이라고 생각한다.

적어도 하루에 다섯 번은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라는 인사를 받으며 살자. 그러려면 뭔가 베풀어야 한다. 그래서 그 사람의 감사일기장에 내가 고마운 사람으로 기록되게 살았으면 좋겠다.

코로나19로 우리 모두가 어려운 시절을 살아가고 있다. 교회와 그리스도인이 채무자의 삶에만 머물지 말고, 이웃들에게 베풀고 나누는 채권자의 삶을 살았으면 좋겠다.

가정에서, 교회에서, 직장에서, 시장에서, 도로에서 하루에 10번 “고맙습니다!”를 표현하자!(10Q), 하루에 5번 “고맙습니다!” 인사를 받을 수 있게 배려하며 용서하며 살아가자!(5Q) 

코로나 시대의 백신-‘10Q, 5Q’ 운동을 제안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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