꼿꼿한 유교 뿌리에 복음의 꽃이 피다
1920년 문연후 일제시절 갖은 고초
항일정신·지역봉사 등 계속 이어와
기독교 건물론 문화재 사업 첫 선정
셀목회로 재부흥하는 교회로 비상

군위교회 역사는 1920년 한옥 다섯 칸으로 시작됐다. 한옥을 허물고 1937년 지어진 예배당은 교회의 가장 오래된 건물이자 교회의 상징이다. 구 예배당을 시작으로 두번째 예배당(1956년), 본당(1987년), 교육선교관(2002년) 등이 순차적으로 지어졌다. 지금도 네 개의 예배당이 나란히 자리하고 있다. 이렇게 100년의 역사를 간직한 군위교회는 읍내에서 가장 높은 언덕에 자리 잡았다. 유교와 불교가 뿌리를 내린 곳이지만 온갖 고난을 믿음을 이겨내고 복음의 등대처럼 지역사회에 성결의 빛을  밝혔다. 읍내 인구가 8000명인데 등록교인이 1,300명에 이른 것도 전통을 존중하면서도 지역사회의 구심적 역할을 해온 결실이다. 

장로교 포기한 곳에 교회 세워
본래 군위지역은 장로교에서 교회를 세우고자 많은 전도자를 보내어 애썼지만 결실을 보지 못하고 결국 포기해버린 지역이었다. 그만큼 영적으로 척박한 곳이다. 그런데 1920년 7월 2일 김병선 전도사가 군위전도관 개척자로 자원했다.

김 전도사의 내외의 열정적인 구령운동으로 지역의 영혼들이 깨어나기 시작했고 마침내 그해 10월 15일 25번째 성결교회(복음전도관)로 설립되었다.

당시 본부에서 헤스롭 선교사가 이 소식을 듣고 자신의 풍금을 팔아 헌금하였고, 그 재정으로 군위전도관을 매입할 수 있었다. 이후 강태즙 전도사가 사역하던 1927년에는 자체 교회당을 건축 봉헌할 정도로 부흥했다.

특히 청년전도대의 열정은 특별하여 의흥교회와 비안교회 설립으로 이어졌다.

1937년 두 번째 예배당을 지을 때 아픔도 있었다. 예배당 철거 작업을 하던 중 이종익 목사와 노성문 집사가 낙상사고로 사망한 것이다.

구조 당시 이종익 목사는 ‘제일 먼저 찬양을 하고 같이 낙상한 이들의 안부를 물은 뒤 마지막으로 예배당 건축을 걱정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활천> 1938년 1월호).

항일 정신과 순직 정신 성장 밑거름  
이후 군위교회는 수없이 많은 고초에도 순교한 믿음을 잃지 않았다. 일제강점기인 1943년 사중복음의 재림신앙으로 인해 성결교회가 강제 해산을 당할 때 가장 먼저 해산되는 아픔을 겪었다.

제9대 담임 최헌 목사가 부흥회에서 예수 재림과 말세 징조를 설교하고, 교회학교 학생들에게 찬송을 조선말로 합창하게 했다. 일제는 이것이 치안을 방해하고 일왕의 존엄을 모독하는 불경 행위라며 최헌 목사를 잡아가두었다. 이때 여러 교인들도 옥고를 치렀다. 일제는 군위교회를 폐쇄하고 예배당을 헐값에 넘겼다. 

교회가 다시 문을 연 것은 1945년 신사참배를 거부해 투옥됐던 천세광 목사가 고향 군위로 돌아오면서다.  천세광 목사는 흩어진 성도를 심방하고 그들과 함께 1945년 9월 5일 감격스러운 해방기념 예배를 드리며 성결교단에서 가장 먼저 재건한 교회가 되었다. 그의 열정은 지역사회까지 일으켰다. 군위군 치안유지위원장으로 광복 뒤 사회질서를 유지하는 데 기여했다.

허병국 목사는 “두 목사의 항일 운동은 신앙에 상관없이 지역 주민들의 존경과 지지를 이끌기에 충분했다”며 “당시 교회가 종교활동에 그치지 않고 시대적 흐름에 부응하면서 군위교회도 오랜 세월 지역사회에 머무를 수 있었다”고 말했다. 

1959년부터 1992년까지는 부흥과 성장기로 접어들었다. 교회 폐쇄 당시 48명이었던 세례교인이 1962년에는 137명으로 늘었다. 1970년대 산업화로 농촌의 인구가 줄어들 때도 교인들은 기도와 전도로 어려움을 극복하면서 교단의 전도장려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교회는 꾸준히 성장하여 1981년에는 세례교인이 200명을 돌파했다. 교회에 깃든 항일 정신과 순직 정신이 성장의 밑거름이 되었다. 

8000명 인구 중 등록교인 1300명 
허병국 담임목사가 부임한 1993년부터 현재까지는 양적 성장과 영적성숙을 동시에 일궈낸 시기이다. 허 목사는 부임 당시 창립 73년이 된 전통적인 농촌교회에서도 하나님의 부흥이 나타나리라는 확신으로 목회했다.

2007년부터 시작한 셀목회는 젊은 교회로의 체질개선과 성장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는 계기가 됐다. 1993년 허병국 목사 부임 당시 주일 낮예배 장년 평균출석인원이 160명이었으나 2007년도 셀목회 전환 시에는 240명으로 늘었고, 2020년 현재는 350명이 예배를 드리는 지속적인 부흥과 성장이 일어나고 있다.

특히 고령화 지역으로 손꼽히는 군위에서 어린아이부터 청·장년, 노년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나이의 교인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특히 30~50대 젊은 층의 성도가 다수를 이루는 젊고 건강한 교회가 되었다.

현재 군위읍의 인구는 8000명 정도인데, 군위교회의 전체 등록교인은 1300여 명이다. 또 군위읍 초등학교 및 중 고등학교 재학생이 600여 명인데 교회학교 등록인원은 200명 정도다.

성도들의 헌신도 줄을 잇고 있다. 예배당을 신축하다 순직한 노성문 집사의 후손이 5대에 걸쳐서 지금까지 교회를 섬기고 있다.

해방 후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자신이 소유한 대지를 교회 대지와 맞바꾸어 헌납한 장로, 척박한 땅을 어렵게 일구어 교회의 묘지로 헌납한 권사, 모태신앙으로 교회에서 원로장로가 되기까지 80여 년 교회를 섬긴 장로 등 많은 믿음의 선진이 신앙의 유산을 남겼다. 군위교회는 이들의 유산을 이어 받아 교회를 위해 헌신하는 성도들이 지금도 가득하다

100년의 전통 선교의 빛으로 발하다
군위교회는 농촌지역에서 선교에도 모범을 보이고 있다. 100년의 전통을 국내외 선교에 쏟고 있다. 국내의 작은교회와 선교기관 40곳을 지원하고, 지역사회에서 전도와 구제와 장학사업을 실천하고 있다.

또 베트남, 브라질, 필리핀, 캄보디아, 대만, 스웨덴, 중국, 네팔, 인도네시아 등에 10명의 선교사를 파송했고 3개의 해외교회를 개척했다. 특히 창립 100주년을 기념해 올해 인도네시아에 럼바뿌지안교회 예배당과 목사관을 건축하고 있다. 

다채로운 100주년 기념사업도 벌이고 있다. 코로나19 확산으로 잠시 주춤하고 있지만 100주년 기념비 제막식과  임직식을 거행했다. 또 코로나 이전부터 전교인 성경 필사를 쓰고 있으며,  △100년을 살아온 우리의 이야기 간증 △찬양콘서트 △홈커밍데이 △특별새벽기도회 등을 추진하고 있다. 

군위교회 100주년 주요 연혁

1920.10.15     제1대 김병선 전도사 부임
1922~1928     의흥교회 성동교회 비안교회 지교회 창립
1937.6~7     예배당 철거 중
    이종익 목사, 노성문 집사 순직
1937.12.12     첫 예배당 헌당(현 문화재 291호)
1941.12    일제탄압으로 최헌 목사, 정진근 장로, 도기택 장로 등 여러 성도들 투옥
1943.10.1      일제탄압으로 예배 금지 당함
1953.4.13      금구교회 지교회 창립
1956.7     매각당한 교회를 20만원에 다시 매수
1970.4.13     군위유치원 교육청 설립인가 
1981.9     현 성전 대지 1785m²(540평) 매입 
1987.12.12     성전헌당(현 예배당)
1991.02.01     제1교육관 완공, 개관
1993.10.14     제23대 허병국 목사 부임 
1996.1.17      달산교회 지교회 창립
2002.10.20     교육선교관 헌당
2007.7.3       첫 예배당 문화재 제291호 등록
2020.10.15     창립 100주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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