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5일은 섬 선교의 어머니인 문준경 전도사(1891~1950)의 순교기념일이다. 

총회는 여성 최초의 순교자 문준경 전도사의 순교70주년 기념추모예배를 10월 13일 신안군 증도 순교기념관에서 드린다.

올해 문 전도사의 추모예배는 예년보다 더 특별하다. 코로나19로 대면예배를 드리지 못하는 상황에서 그리스도인들이 어떤 자세로 신앙을 지킬 것인가를 되새겨 볼 수 있어서 그렇다.  

하나님을 만나고 평생을 십자가 복음을 전하는 삶을 살았던 영원한 전도자 문순경 전도사의 영성은 세 가지로 요약된다.

하나는 순교 영성이다. 그는 예수를 신랑으로 모시고, 오직 복음을 위해 희생하며 헌신하는 삶을 살았다. 일제 말기 신사참배 거부와 위안부 징집 반대운동으로 인해 옥고를 치렀던 문 전도사는 6.25 전란 때 순교했다.

교회 성도들이 위기에 처하자 죽음을 각오하고 증동리교회 신자들을 보호하기 위해 증도로 돌아왔다가 1950년 10월 5일 모래사장에서 인민군들에게 죽임을 당했다.

하나님께 온전한 순종과 헌신으로 살아온 그녀는 ‘알을 많이 깐 씨암탉’이라는 죄명으로 죽음을 맞는 순간에도 자신의 안위보다는 성도들을 살려 달라고 애원하다가 최후를 맞았다. 온 삶이 하나님을 향해 있었기에 온갖 문초와 고문, 혹형을 견뎌내고 기쁘게 순교할 수 있었던 것이다. 

또 하나는 문 전도사의 복음에 대한 열정이다. 한국교회 초기 여성들은 대부분 교회에서 남자 교역자를 돕는 조력자의 위치에 있었다.

하지만 문 전도사는 아무도 가지 않는 섬에서 여성의 몸으로 섬 복음화에 투신했다. 일 년에 아홉 켤레 고무신을 갈아 신어가며 복음을 전했다.

배가 다니기 힘든 곳에 썰물 때에 맞춰 섬에 들어갔다가 나오다 갑자기 들이닥친 바닷물 때문에 목숨을 위협받은 일도 여러 번이었다.

이런 열정으로 임자 진리교회, 중동리교회, 대초리교회, 방축리교회, 우전리교회 등 11곳을 개척했다. 

마지막으로 비움과 나눔의 영성이다. 문 전도사 가난한 자의 위로 되고, 병든 자의 의사, 아이 낳는 집의 산파, 문맹 퇴치 미신 타파의 선봉자가 되었다.

모든 것을 섬사람을 위하였고 자기를 위해서는 아무것도 취한 것이 없었다. 그는 사랑으로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려는 봉사자였으며, 대중들의 아픔을 이해하는 목자였다.

이런 사랑과 자비로 뿌린 복음의 씨앗은 증도가 우리나라에서 개신교 복음화율이 가장 높은 지역이 되는 밑거름이 됐다. 

우리는 갖은 유혹과 박해에도 흔들림 없이 자신의 신앙을 지켜낸 문 전도사처럼 순교영성을 삶 속에서 실천해야 한다. 그런 과정 속에서 불이익을 받을 수도 있고, 비난을 당할 수도 있지만 일상에서 그리스도 가르침에 반하는 것을 거부하고, 손해와 희생을 두려워하지 않고 자신을 내던져 복음을 증거 해야 한다.

우리가 순교자를 공경하며 추모하는 이유도 오늘의 그리스도인들이 순교자들의 삶을 본받고 이 시대가 요구하는 순교의 삶을 살아가도록 하려는 데 있다.  

기리고 기념하며 기억하는 일은 단순히 과거의 어느 한 순간을 회상하는 일에 그치지 않는다. 예수 그리스도의 단 한 번의 희생 제사는 세상 끝 날까지 되풀이되면서도 매번 새롭게 재현되고, 그것이 곧 그리스도인들의 신앙과 삶으로 구현된다.

마찬가지로, 문 전도사 등 신앙 선배의 삶과 죽음은 그 후손들인 우리의 마음과 정신, 삶과 죽음 안에서 순간순간 새롭게 되살아나야 한다. 그럴 때에 우리는 위대한 신앙의 선조들에 부끄럽지 않게 순교의 정신을 살아간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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