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도 말, 유니온교회가 개척된 지 두 달쯤 지났다. 신자가 몇 명 안 되었다. 지팡이 짚고 오신 노인 한 분이 등록했다. 이름이 한매, 직분은 권사였다. 그런데 그분이 바로 김교신(1901~ 1945) 선생의 아내였다. 양인성의 친족이 인도했다.

김교신이라면 「성서조선」이라는 신앙잡지 창간 발행인이었다. 일제식민지시대인 1927년 7월에 창간하여 1942년까지 계속되었다. 발행인은 물론 구독자들까지 체포·고문하고 투옥시킨 빌미가 된 명망 있는 신앙잡지였다.  

한매 권사를 심방했다. “목사님, 저는 목사님께서 ‘지남철 목사’가 되시라고 기도합네다. 신자들마다 목사님께 쩔꺽쩔꺽 들러붙었으면 좋겠습네다.” 그러셨다. “아이구, 감사합니다. 남자들은 괜찮은데 여자들이 쩔꺽쩔꺽 들러붙으면 목회 망해요” 하니 폭소를 하셨다. 이민교회는 방문자는 많아도 정착신자는 적은 것을 안타까워 하셨다.   

얼마 안 가서 재적 성도가 100명이 넘어섰다. 그 때 또 한 번 심방을 했다. 내 손목을 잡고 침실로 안내했다. 침실 벽면에 유니온교회 성도 이름을 빼곡하게 적어서 붙였다. 눕기 전 침대에 앉아 그 사면벽에 기록된 성도 이름을 하나하나 부르며 기도하신단다.

그 말씀 듣고 나도 한매 권사님 손을 꼭 부여잡고 눈을 뜬 채로 그 이름들을 모두 불러가며 기도했다. 신앙의 어머니를 만난 감격에 엉엉 울면서…. 권사님도 훌쩍이셨다. 개척교회 목사의 피곤이 한꺼번에 풀렸다.

한매 권사님은 남편을 ‘김 선생’이라 불렀다. 김교신 선생 이야기를 많이 자세하게 듣기도 했다. 정보도 수집해 읽었다. 김 선생을 한국의 우찌무라간조(內村鑑三)라는 분들도 있다. 무교회주의 대표주자란 뜻이다.  

김교신 선생은 1927년 동경고등사범학교를 졸업한 뒤 한국으로 돌아와 고등학교 교사로서 함석헌, 송두용, 양인성 등과 ‘조선성서연구회’를 조직하여 ‘예수와 성서 위에 세워진 기독교’ 운동을 전개했다.

그 연구와 토론결과를 모아 「성서조선」을 발행, 보급을 주도했다. 그런데 그 권두문 ‘조와’(弔蛙, 얼어죽은 개구리에 대한 조사)가 필화사건에 걸려들어 일제치하에서 혹독한 수난을 받고 잡지도 폐간되었다. 우리 성결교회의 교단폐쇄 수난과 때를 같이한다.

그런데 김교신 도일 초기 곧 1919년부터 1922년 어간에 그는 카우만 미국선교사가 설립한 동경성서학원에서 기숙했다. 기독교와 본격적 첫 접촉은 바로 서울신학대학교의 모체인 동경성서학원에서였다.

세례도 받았다. 그러나 기성교회 지도자들의 타락과 위선에 회의를 느껴 일본의 반전반제 신학자 우찌무라간조 문하에 들어가 신앙수업을 했다. 동경고등사범학교에 입학하면서 지성적 성장에 따른 신앙적 성장 욕구가 있었던 것으로 이해된다. 

당시 지성인의 모범이고 교육자의 단정한 표상이던 김교신 선생이 성결교회 지도자였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매우 크다. 동시에 김교신판 기독교운동을 살펴보면서 수정해야 할 편견이 있다. 그는 결코 원색적 무교회주의자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아니, 오히려 참교회를 추구하려 했고 그런 점에서 기성교회를 전면 부인하기보다는 신선한 도전으로 개혁하려는 의도가 강했다. 이런 점에서 우찌무라와는 그 결이 매우 다르다. 김교신 선생의 아들 김정민 장로교회 장로는 필자와 매우 가까이 지냈다. 필자의 견해에 그도 동의했다.

우리 성결교회가 지금 지성인들을 끌어올리는 효율적인 그물일 수 있을까. 그런 약점을 보완하는 일에 김교신 선생 사역이 유효한 단서를 제공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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