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홍환 목사(장평교회)
       오홍환 목사(장평교회)

텅빈 예배당에서 카메라를 보고 설교를 하는 내 모습은 여전히 낯설다. 다양한 감정선들로 인한 혼잡과 어지러움을 느낄 정도다. 예배다운 예배의 모습(?)이 아닌 것 때문일까? 아니면 하나님께서 계속해서 시그널을 보내고 있는 것을 무시하는 나의 고집으로 인한 합리화가 낯설기 때문일까? 코로나19 바이러스로 인해서 세상이 시끄럽다. 아니 고요했던 우리들의 내면이 더욱 시끄럽고 기승을 부린다. 

교회는 코로나 바이러스의 포로가 되었다. 물론 세상 역시 코로나 바이러스의 포로가 되었다. 포로된 결과는 심각하다. 만남이 좌절이 되고, ‘나와 너’ 사이에 보이지 않는 얇은 막이 생겨나게 되었다. 서로 믿지 못하는 불신의 시대가 되었다.

특히 세상이 바라보는 교회의 모습은 매우 거칠다. 정보가 확장된 시대에 살아가고 있는 현대의 교회는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하여 숨겨지지 않는 절망을 세상에 안겨주는 것 같다. 

가만히 우리들의 내면을 들여다보면 사실 교회가 코로나 바이러스의 포로가 된 것이 아니라, 이미 세상의 포로가 되었음을 감지하게 된다. 우리들의 가져야할 거창한 사명을 내세우지 않고 “그리스도인 다움”을 생각해봐도 이미 물질과 성공의 메커니즘에 사로잡혀 있음을 발견한다. 

여전히 밤하늘에는 십자가가 영롱하게 비치고 있지만, 그것은 그저 그럴뿐이다. 세상을 꾸미는 그저 그런 그림이다. 거기에는 빛과 소금은 낯부끄러운 단어가 되어 버렸다.

하나님은 왜 코로나 바이러스를 우리들에게 허락하셨을까? 코로나 바이러스를 과학적으로, 의학적으로, 합리적으로 설명이 가능하다. 

그것은 세상 사람들의 전문가들에게 맡겨도 된다. 우리들은 여기에서 한 발 더 나가야 한다. 코로나는 그저 우연히 주어진 것이 아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섭리를 믿는다. 이 세상의 역사에 보이지 않는 손길로 이끄심도 믿는다. 그러한 믿음의 연장선상에서 코로나 바이러스 역시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주신 것이다. 

하나님은 코로나 바이러스를 왜 주셨을까? 여기에 오늘 우리들의 신앙의 명제를 찾아볼 수 있겠다. 유다의 역사가 마감이 되고 바벨론의 포로가 된 시절을 떠올려보자. 선지자 예레미야는 하나님께서 더 이상 예배를 드리지 못하게 하셨다고 설교한다. 

북왕조가 멸망의 징조들을 보일 때 이미 선지자 아모스에 의해서 설명되어진 이야기다. 그들이 드려지는 예배, 제사는 하나님을 역겹게 만들었다. 아름답게 울려퍼지는 찬송의 소리를 하나님께서는 시끄럽다고 하신다. 듣기 싫다고 고개를 외면하신다.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해서 예배다움(?)이 없어지는 것 같은 상황을 직면하게 된다. 어쩌면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해서 우리들의 예배가 역겹거나 고개를 돌리게 할 만한 예배가 아닌지 겁이 난다.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해서 하나님은 우리들의 영적인 모습을 뒤돌아보기를 원하신다. 코로나 바이러스는 분명 하나님의 재앙인 동시에 심판이다. 코로나 바이러스 이전 우리들의 모습은 하나님의 고개를 돌리게 하는 것이었다면, 코로나 시대를 관통하고 있는 지금 우리들은 우리들의 모습을 깨달아야 하며 코로나 이후의 모습을 준비해야 한다. 이것이 코로나 바이러스를 주신 하나님의 은혜이다. 

그래서 코로나 바이러스는 어떤 의미에서는 축복이다. 유다의 멸망은 고난의 시작이며 하나님의 징계의 결과다. 그러나 그것은 또 다른 한편으로 축복이었다. 왜 그런가? 그들이 멸망당하지 않았다면 그들은 영원히 하나님을 잃어버리고 있으면서도 그것이 온당하다고 생각할 수 있는 오류를 낳기 때문이다.

코로나 이전 교회는 하나님의 고개를 돌리게 하는 세상의 포로였다면, 코로나라는 과정을 통해서 영원히 멸망의 길로 가지 않고 돌이킬 수 있고, 미래를 새롭게 바라볼 수 있으며, 코로나 이후의 교회의 모습을 희망할 수 있기에 코로나는 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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