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신 장벽 제거는 진정한 희생으로

한국교회 초기에 미스 윤(Miss Yun)이라는 16세 소녀가 있었다. 그녀는 화상(火傷)으로 손가락 세 개가 손바닥에 붙어 있었다. 그녀의 성격은 매우 밝고 아름다웠지만 기형적인 손 때문에 결혼하지 못하고 있었다. 당시 로제타 셔우드(Rosetta Sherwood) 선교사가 미스 윤의 기형적인 손을 수술했다. 결과는 매우 성공적이었지만, 한 가지 문제가 생겼다. 손의 상처를 덮었지만 피부가 모자라 보기 싫은 흉터가 남게 되었다. 그래서 셔우드 선교사는 식피(植皮)수술을 행하려고 했다. 하지만 통역할 사람이 없어서 식피수술의 필요성을 환자에게 이해시킬 수 없었던 셔우드는 먼저 자신의 몸에서 피부를 떼어냈다. 그리곤 환자의 몸에서 필요한 피부를 떼어내려고 했다. 하지만 환자는 물론 수술을 보조하던 ‘봉선 어머니’ 조차 셔우드의 의도를 알지 못했다. 셔우드는 할 수 없이 자신의 몸에서 피부를 더 떼어내려고 했지만 두 여자가 한사코 말리는 바람에 단념해야 했다.

셔우드는 다음날, 이화학당 교사인 로드와일러(Louise C. Rothweiler)에게 통역을 부탁했다. 이런 과정을 통해 로드와일러와 마거리트 벵겔 양이 자신들의 피부를 내놓았고, 학교에서 말괄량이로 불렸던 ‘봉업이’도 팔을 내밀었다. 그러자 비로소 환자와 그녀의 오빠도 피부를 떼도록 허락했다. 그래서 30여개의 식피수술을 할 수 있었고, 그 중의 8개가 성공하여 흉터가 거의 가려졌다.

2-3일 후에 한 남자가 병원을 찾아왔다. 셔우드가 난산할 때 돌봐준 부인의 남편이었다. 그가 약을 지어달라고 부탁했다. 사정 이야기를 듣고, 셔우드는 부인의 상태가 매우 위급하다는 것을 알고 직접 환자를 보러가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밖에는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고 있었다. 남편은 셔우드가 갈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때 병원에서 궂은 일을 도맡아하던 ‘귀수’가 그에게 이렇게 말했다. “조선 여자에게 자기 피부까지 떼어준 의사인데 이 정도의 비 때문에 왕진을 안 가겠느냐?” 귀수의 뇌리에는 셔우드가 한국인들을 위해 무엇이든지 해줄 수 있는 사람으로 새겨졌던 것이다.

이처럼 미스 윤의 수술에 대한 소문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퍼져나갔다. 이런 감동적인 이야기는 한국인들이 선교사들과 기독교에 대해 가졌던 불신의 장벽을 허물어뜨렸다. 그것은 전혀 의도하지 못했던 결과였다. 
여기서 우리는 초기 내한 선교사들이 나눠주었던 희생적인 사랑의 한 단면을 보게 된다. 타인의 아픔을 자신의 아픔처럼 안타깝게 여겼던…. 그래서 할 수만 있다면 자신의 살갗을 주어서라도 환자의 상처를 치료하고자 했던 것이다. 이 이야기는 많은 한국인들의 심금을 울렸다.

참된 기독교 복음의 신비가 여기에 있지 않을까? 굳이 생색내거나 드러내려고 하지 않아도 그 아름다운 열매를 맺게 되는 것…. 그래서 예수님이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고 하셨던 것은 아닐까? 먼저 받은 자가 자신의 옥합을 깨는 사랑의 실천 없이 어떻게 복음을 구체화할 수 있을까? 그런 순수한 헌신 없이 어떻게 흑암의 견고한 진들을 향해 허물어지라고 말할 수 있을까?

최근 한국교회 내에 분별이 안 되는 일들이 너무 많아진 것 같다. 누구를 위한 그리고 무엇을 위한 사역인지, 과연 기독교 사역인지 아니면 기독교를 빙자한 사업인지…. 그 저변에는 자본독점이나 시장경제의 원리가 마치 기독교 복음의 핵심처럼 자리하는 것 같다. 이런 모양새의 기독교가 복음의 진수라면 과연 어느 정도 호소력이 있을지 염려스럽지 않을 수 없다.

한국교회에 대한 개혁의 목소리가 높고 사회적인 병폐도 심하다. 곪고 상처난 곳을 도려내고 새로운 살을 붙이는 피부의식 같은 수술이 필요하다. 구호나 교리전파가 아니라 희생이 따르는 헌신이 먼저 필요하다. 진정성을 담은 작은 실천이 이런 변화의 물꼬가 아닐까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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