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다.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은 기독교 진리의 기반이고 영원한 전도표제이며 선교의 핵심 케리그마이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서기 29년 춘분이 지난 후, 첫 만월과 안식일이 지난 첫날 새벽에 이스라엘의 예루살렘 근교 무덤에서 일어난 역사적 사건이다. 이 부활은 타종교에 대한 기독교의 차별성과 함께 우위성과 절대성을 웅변한다.

그러나 교회가 이 역사적 부활만을 자랑해서는 안 된다. 주님의 부활과 함께 우리의 부활신앙이 중요하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않으리라. 네가 이것을 믿느냐?”(요 11:25~26) 부활의 주님은 지금도 인류에게 계속 묻고 계신다.

영원한 삶과 승리의 약속
21세기 최첨단 과학과 지식정보사회, 절대성과 초자연성을 부인하는 포스트모더니즘이 지배하는 인본주의 사회, 그리고 역사 이래 최고의 편리함과 안락을 누리는 오늘의 인류에게 2천 년 전, 예수 부활의 사건이 주는 의미가 무엇이며, 왜 부활신앙이 그처럼 중요할까?

첫째로, 부활신앙은 인류에게 영원한 삶을 보장하기 때문이다. 에덴의 아담 이후 수천억 명의 인류가 세상에 태어나 살았지만, 모두 무덤만을 남기고 갔다. 그러나 오직 한 분, 예수만이 사흘 만에 부활하셨다.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기 때문에 죽음을 이기셨다.

이 신비로운 초자연적 능력이 부활의 주님을 믿는 성도들에게 임하는 은총이다. 오늘 최첨단 의학기술로 인류의 죽음을 초극하려고 안간힘을 쓰지만 평균수명 연장에 불과하다. 따라서 이 부활신앙을 지닌 성도들은 죽음이 두렵지 않고 영원한 삶을 보장 받는다. 2천년 동안 교회를 지켜 온 수많은 순교자들이 바로 그런 분들이 아니겠는가?

둘째로, 부활신앙은 영원한 진리의 승리를 약속하기 때문이다. 세상은 불의와 탐욕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에 언제 어느 곳에서나 의인들의 신음소리와 선한 자들의 통곡소리로 가득하다. 그래서 토스토엡스키는 그의 소설 ‘카라마조프의 형제들’을 통해 이런 세상을 다스리신다는 ‘하나님이 과연 살아있는가?’ 하고 계속 묻고 있다.

종교기득권자들의 탐욕과 선동에 놀아난 무지한 백성들의 소요로 예수를 죽였으나 그리스도는 그들의 무덤을 박차고 부활하심으로 의와 진리가 영원히 승리함을 인류에게 계속 외치고 계신다. 오늘도 부활하신 그리스도는 부활의 영으로 성도들을 옷 입혀 모든 불의와 위선을 몰아내시며, 이 진리와 생명의 대열에 모든 성도들의 참여를 부르고 계신다.

고난을 통한 새 생명의 역사
셋째로, 부활신앙은 성도의 고난을 통해 새 생명의 역사를 창조하시기 때문이다. 사도 바울은 날마다 십자가 지는 삶과 함께 부활신앙의 선포를 통해 온갖 고난과 박해를 극복하는 초인적 인 삶을 살았다. 또한 그가 이르는 곳마다 부활의 예수가 현존하는 많은 교회를 세웠으며, 예수부활의 생명을 증언하는 13권의 기록을 통해 인류 구원의 초석을 다지는 위대한 삶을 살았다. 십자가와 부활의 메시지는 만물을 회복시키고 인류를 구원하는 소망이다.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어야 새 생명이 움트듯 우리 그리스도인은 더 낮아지고 자기를 비우고 희생하고 죽어야 부활의 새 생명으로 자기도 살고 교회도 살며 민족도 살고 인류를 살릴 수 있다. 우리 마음속의 미움이 죽어야 사랑이 꽃피고, 거짓이 죽어야 진실이 소생하며, 이기심과 탐욕이 죽어야 새 하늘과 새 땅의 참 소망의 세계가 부활의 영으로 전개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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