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양에 성경책으로 도배된 집이 있었다. 영문주사(營門主事)였던 박영식의 집이 바로 그곳이다. 박영식은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한문성경 3권을 수중에 넣게 되었다. 12세의 소년 최치량이 성경책이 금서(禁書)임을 알고 겁이 나서 가지고 온 것이었다.

고심 끝에 박영식은 그것을 뜯어 자기 집 벽지로 사용했다. 종이가 희귀하기도 했거니와 인쇄된 종이 질이 너무 좋아 태워버리기에는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 일이 전혀 예기치 못했던 방향으로 흘러갔다. 최치량이 성경으로 도배된 박영식의 집을 출입하다가 벽에 붙어 있는 성경 말씀을 읽고 기독교인이 된 것이다.

박영식 자신에게도 놀라운 일이 발생했다. 집안에 들어가면 사방에서 자연스럽게 성경 말씀이 눈에 들어왔다. 그래서 처음에는 심심풀이호기심으로 별 뜻 없이 읽었는데, 죽음 후에 영생이 있고 심판이 있다는 말씀에 붙잡히게 되었다.

그는 심각한 고민 끝에, 결국 예수님을 영접하고 구원을 얻게 되었다. 그뿐 아니라 성경으로 도배된 자신의 집을 예배처소로 내놓아 평양 최초의 교회인 널다리골 교회를 세웠다. 이 널다리골 교회는 1907년 영적 대각성운동의 근원지였던 바로 장대현교회의 전신이었다.

이런 놀라운 축복의 배후에는 한국 최초의 개신교 순교자로 알려진 토마스(Robert J. Thomas) 선교사가 자리하고 있다. 토마스 선교사는 1863년 런던선교회의 파송을 받아 상해로 갔다. 그런데 아내 캐롤라인(Caroline Godfrey)이 낯선 환경으로 그만 병사하고 말았다. 게다가 상해 주재 책임자인 무어헤드(W. Muirhead)와의 불화까지 겹치면서 선교사직을 사임하고 말았다.

이후 토마스는 산동성 지푸로 가 청나라 해상세관의 통역으로 취직했다. 토마스는 그곳에서 스코틀랜드 성서공회 총무 윌리엄슨(A. Williamson)을 만나 다시 선교의 사명을 회복하게 되었고 한국천주교 신자인 김자평과 최선일을 통해 한국 상황을 듣게 되었다.

한국선교의 꿈을 갖게 된 토마스는 1865년 9월 황해도 연안의 창린도(昌麟島)에 도착했다. 토마스는 2개월 반 동안 그곳에 머물면서 한국어를 배우는 한편 성경을 섬 주민들에게 나누어주었다. 베이징으로 돌아간 그는 한국외교사절단 일행을 만나게 되었다.

그때 토마스는 평양감사 박규수에게 성경을 전하면서 “내가 평양에 가게 되면 복음을 전할 수 있도록 협조해 주기를 바랍니다”라고 정중히 부탁했다. 한국선교에 대한 그의 열정이 활활 타오르고 있었던 것이다.

1866년 8월, 토마스는 미국 국적의 무장상선 제너럴셔먼호에 승선하여 한반도로 돌아왔다. 통역 및 안내인 자격이었다. 조선당국의 입국불가 통지에도 불구하고, 셔먼호는 대동강을 거슬러 올라와 양각도에 닻을 내렸다. 그러나 셔먼호는 관군과의 접전 끝에 불길에 휩싸이게 되었다.

토마스 선교사는 성경책 1권을 품에 안고 뭍으로 나왔다. 하지만 그는 병졸 박춘권에 의해, 대동강 모래사장에 순교의 피를 흘려야만 했다. 당시 토마스의 나이는 27세였다. 하지만 토마스 선교사의 순교는 헛되지 않았다. 그가 흘린 피는 한국 선교를 위한 한 알의 밀알이 되었던 것이다.

토마스는 죽기 전에 박춘권에게 예수님을 믿으라고 하면서 성경책을 전해주었다. 그런데 토마스의 순교 장면은 박춘권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이에 대해 박춘권은 이렇게 회고했다. “내가 서양 사람을 죽이는 중에 한사람을 죽인 것은 내가 지금 생각할수록 이상한 감이 들었다. 내가 그를 찌르려고 할 때에 그는 두 손을 마주잡고 무슨 말을 한 후 붉은 베를 입힌 책을 가지고 웃으면서 나에게 받으라고 권하였다. 내가 죽이기는 하였으나 이 책을 받지 않을 수가 없어서 받아왔노라." 이에 박춘권은 몰래 그 현장에 다시 가서 흩어진 성경책을 가져다 읽고는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 그는 후에 안주교회의 장로가 되었다.

이외에도 많은 이들이 토마스 선교사가 전해 준 성경을 받아 읽고 훗날 평양의 유력한 신앙인들이 되었다. 장사포의 홍신길은 서가교회, 석정호의 김영섭과 김종권은 강서교회, 만경대의 최치량은 평양 널다리골 교회의 창설자들이 되었다. 토마스의 순교는 평양 복음화의 초석이 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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