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의 스테파노스를 주리라! “ stevfanoz”

신약성서에는 “면류관”을 뜻하는 두 종류의 헬라어 단어가 나타난다. 우리말 성경에는 이 두 단어가 동일하게 ‘면류관’으로 번역되지만, 그 미묘한 뉘앙스의 차이를 살리지 못하면 하나님의 말씀이 살아서 역동하는 그 달고 오묘한 맛의 신비를 느끼지 못하게 된다. 그래서 구별된 헬라어 원어처럼 번역에서도 서로 구별 되어야 마땅하다.

그 하나는 계시록에만 3번 등장하는 ‘디아데마’(diavhma, 12:3, 13:1, 19:12)라는 용어이며, 이 말로부터 영어의 ‘diadem’(왕관)이 파생되었다. 원래 디아데마는 “둘레를 동여매다”라는 의미의 동사에서 유래하는데, 페르시아의 왕들이 터어번(turban: 인도 등에서 남자가 머리에 감는 두건)이나 티아라(tiara: 옛 페르시아 사람의 두건) 위에 묶어서 사용했던 흰색으로 표시된 파란 리본띠를 가리킨 말이었다.

이것은 왕의 머리에 사용되는 장식품이었기 때문에 왕권이나 권력을 상징했다. 때때로 하나 이상의 디아데마(왕관)가 동시에 씌워지곤 했다. 이집트의 왕 프톨레미가 안디옥에 승리의 개선을 했을 때 그는 그의 머리 위에 두 디아데마를 썼는데, 한 디아데마는 아시아에 대한 그의 주권을 보여 주는 것이었고, 다른 디아데마는 이집트에 대한 그의 왕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마카비상 11:13).

계시록에서도 예수님은 머리 위에 많은 디아데마(19:12)를, 사탄은 일곱 디아데마(12:3)를, 적그리스도는 열 개의 디아데마(13:1)를 쓰고 있다. 그러나 이 디아데마는 성도들에게는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늘 권세를 소유하신 예수님이나 어둠의 권세를 가진 사탄 또한 적그리스도에게만 사용되는 전문용어이다.

면류관으로 번역되는 또 다른 헬라어 단어는 이른바 ‘스테파노스’(stevfanoz, 신약성서에 25번 등장)이다. 고대 지중해 세계에서도 운동경기자들에게 주는 면류관이 있었다. 올림픽 경기에서 우승을 한 승리자들, 즉 골인지점을 제일 먼저 통과한 달리기 주자와 원반이나 창을 가장 멀리 던진 선수, 그리고 상대방을 제압한 레슬링선수에게 주어지는 면류관이었다. 이러한 이유로 스테파노스는 승리의 표상이었고, 가치 있는 명예의 상징이었으며, 축제와 기쁨의 상징이었다.

이 면류관은 올리브, 월계수, 셀러리, 솔잎 등을 그 가지와 함께 엮어 만든 관이었다. 이것이 교회의 언어로 변천되어서 스테파노스는 구원의 믿음을 지킨 순교자들에게 주어지는 영광의 면류관(벧전 5:4), 시험을 견디는 자에게 주어지는 생명의 면류관(약 1:12, 계 2:10), 그리고 의의 면류관(딤후 4:8), 자랑의 면류관(살전 2:19), 기쁨의 면류관(빌 4:1) 등의 의미로 사용되었다. 최초 그리스도교 순교자의 이름인 스데반 역시 이 스테파노스에서 유래되었다.

그렇지만 무엇보다 예수님의 수난을 기억하는 고난주간에 우리가 되새겨야 할 또 하나의 면류관은 바로 로마 군병들이 예수님의 머리 위에 씌운 ‘가시 스테파노스’인 것이다(마 27:29, 막 15:17, 요 19:2, 5). 그의 면류관은 외관상 패배한 것 같이 보이지만 실상은 이미 사탄을 이기신 주님을 위하여 예비된 승리자의 면류관이었다.

공자는 자신의 제자인 안회(顔回, BC 521-481)를 가리키며 ‘한 대광주리의 밥과 한 표주박의 물을 마시며 좁고 누추한 거리에 사는 것을 다른 사람들은 시름겨워하거늘, 안회는 그 속에서도 즐거움을 고치지 않는구나’라고 칭찬했다고 한다. 여기서 유래한 말이 단표누항(簞瓢陋巷)이다. 이 말의 뜻은 누추한 거리에서 먹는 대바구니의 밥과 표주박의 물이라는 뜻으로, 소박한 시골 살림 또는 청빈한 선비의 살림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다.

거룩한 한 주간이라도 한국교회는 인류의 구원을 위해 가시면류관을 쓰시고 십자가의 수난을 감내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닮도록 고뇌의 시간을 가져야 할 것이다. 그분의 생애는 단표누항의 삶이었고, 그 절정은 가시면류관이었다. 이처럼 면류관은 인간이 어떠한 환경과 상황에서도 예수님처럼 신앙의 근원적 비약을 이루게 될 때 부여받는 것이라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자칫 그 면류관을 받기 위해서 신앙의 도약을 시도하는 것이라면 번지수를 잘못 짚은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면류관이 신앙의 장애물이 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면류관은 신앙의 자발성, 곧 예수 따르미로 살다보니 자연스럽게 받게 되는 보상이다. 그러니 거룩한 고난주간에 예수를 믿는 청아한 신앙의 숨결을 따라서 그분의 가시면류관을 깊이 사색하는 시간을 갖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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