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복음과 전통문화의 변혁

기독교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서는 불가피하게 전통과의 문화적 충돌이 일어난다. 그런 경우 대체로 기독교는 전통의 파괴자로 인식되게 된다. 특히 전통은 새로운 변화를 거부하는 수구세력의 강력한 저항 기제가 된다.

기독교 복음이 한반도에 전파되는 과정에서도 그런 사례는 비일비재했다. 특히 남녀유별의 유교적 풍습에 깊이 인박혀 있던 우리민족에게 신분과 성(性)을 초월하여 하나 되게 하는 기독교 복음은 마치 염병처럼 여겨졌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교회는 불필요한 마찰을 피하고 효과적으로 복음을 전할 수 있는 길을 모색해야 했다.

그 과정에서 서구에서는 볼 수 없던 진기한 현상들이 한국교회 안에 등장했다. 교회 안에 휘장이나 칸막이를 세워 남녀 좌석을 구분했던 것도 그와 같은 현상이다. 이는 특히 가내문화에 젖어 있던 여성들이 “어찌 남의 남자를 볼 수 있겠느냐”며 예배나 성경공부반과 같은 모임에 오기를 꺼려하자 생겨난 것이었다.

“ㄱ”자 형태의 교회도 남녀유별의 풍습을 배려한 현상이었다. 한쪽에는 남자석, 다른 쪽에는 여자석을 정하고 강대는 모서리에 설치하여 양쪽 다 설교를 들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이었다. 현존하고 있는 “ㄱ”자 교회로는 김제의 금산교회와 익산의 두동교회가 있다. 이런 추세가 점차 줄어들기는 했지만, 1920년대 중반까지도 곳곳에서 여전히 선호되고 있었다. 

그러나 때로 한국교회는 전통문화에 대해 정면으로 충돌하기도 했다. 유교문화의 중심에 자리하던 제사문제는 특히 중요한 현안이었다. 실제로, 원산에 있던 한국인 신자들 사이에서 제사 문제로 인해 갈등이 일어났다. 이에 선교사 게일이 한국인 신자들로부터 의견을 수렴했는데, 그 결과 신자들 대다수가 제사를 지내는 것은 허용될 수 없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이처럼 한국교회는 처음부터 제사는 기독교 신앙과 배치되는 것으로 규정하여 제사를 금하도록 했다.

첩을 두는 복혼(複婚) 혹은 중혼(重婚)의 문제도 어려운 문제였다. 첩이 일반화된 상황에서 이를 금한다는 것은 보통 어려운 문제가 아니었다. 무엇보다 중혼한 이들이 교회 직분자가 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는 심각한 주제였다. 하지만 한국교회는 초기부터 조혼의 악습과 중혼의 비윤리성을 깨우치며, 첩의 문제를 철저하게 금지하는 것을 원칙으로 삼았다.

감리교는 이미 1895년에 이렇게 결의하였다. “이것은 우리 감리교 연회에서 결의한 것인 바 어떠한 사람이든지 첩을 두는 것은 교회의 법과 규례에 어긋나는 것이므로 비록 교회에 나오더라도 출교시킬 것이며, 또한 그런 사람은 감리교회에 들어오는 것을 금한다.” 이런 태도는 장로교에서도 동일했다. 윌리엄 베어드가 쓴 “기독교회는 일부다처주의자들을 용납할 것인가?”하는 연구보고서는 이런 배경에서 나온 것이었다. 이처럼 한국교회는 초기부터 제사문제와 첩의 문제를 철저하게 금지하는 것을 원칙으로 삼았다. 이로 인해 직분자들 중에서도 교회를 떠난 이들이 적지 않았지만 한국교회는 이 원칙을 준수했다.

이런 일련의 조치들은 한국교회가 당시 한국사회의 모순을 개혁하고 새로운 변화를 이끄는데 얼마나 관심이 많았으며, 또 실제적이었는가를 잘 보여준다. 이는 한국 사회가 1920-30년대 들어와서야 비로소 근대적 부부관계와 법적인 일부일처제에 관심을 피력하기 시작했고, 축첩제가 사회혁신을 위해 폐지되어야 하는 것으로 논의되었다는 것을 고려할 때, 한국교회의 진취적 노력들이 얼마나 앞섰던 것인가를 알 수 있다.

기독교 복음은 세상을 변혁시키는 힘을 함축하고 있다. 기독교는 한국 사회의 여러 분야를 변화를 시켜왔다. 남녀평등과 여권신장을 가져왔고, 인간의 존엄성과 인권에 대한 관심도 환기시켜 주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최근 한국교회는 세상을 변혁시키는 힘을 잃어버리고 있는 것 같다. 이제 변혁에 저항하는 안전지대에서 벗어나 한국 사회의 건강성을 주도하는 선견지명의 지혜를 모아야 할 때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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