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의 향기 날렸던 거리의 성자, 방애인

1920년대 중반에 접어들면서 한국교회 내에는 ‘신앙생활의 사회화와 실제화’를 부르짖는 목소리가 커지기 시작했다. 기존 신앙의 퇴행적 자세에 대한 비판, 사회주의 세력의 대두, 사회경제적 황폐화 현상 등이 그 배경으로 작용했다. 당시 교회에 대한 사회의 불신풍조가 팽배해 있었고, 교계 일각에서는 적극적인 현실참여를 통한 사회현실개조에서 그 돌파구를 찾고자 했다. 특히 1928년 예루살렘 국제선교협의회(IMC)를 계기로 한국 기독교인들의 사회의식은 활짝 개화되기 시작했다.

“거리의 성자"로 불렸던 방애인(1909-1933) 선생의 삶은 신앙생활의 실제화를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라 할 수 있다. 짧지만 굵직했던 그녀의 삶은 따뜻한 사회적 파장을 일으켰다. 얼마나 감동적이었는지, 제도권 교회에 식상함을 느꼈던 김교신까지도 ‘성서조선?’에 친히 그녀를 소개하며 극찬할 정도였다.

그녀는 황해도 황주의 재산가이자 기독교 집안에서 장녀로 태어났다. 그 덕택에 그녀는 어려서부터 교회에 출석하며, 신교육도 일찍부터 받을 수 있었다. 1926년 호수돈여고를 졸업한 그녀는 그해 4월에 전주 기전여학교 교사로 부임했다. 첫 교사생활은 세상을 모르는 때 묻지 않은 신여성의 모습 그대로였다. 하지만 이때부터 스며든 영적 갈증을 해갈하지 못하고 결국 고향으로 돌아가고 말았다.

이후 그녀는 모교인 양성학교 교사로 재직하면서 신앙생활의 새로운 전기를 맞게 됐다. 습관적이고 형식적인 신앙생활의 틀에서 벗어나 새로운 종교적 체험을 갈구하게 된 것이다. 그녀는 부흥회에 참석하고 성경을 가까이 하며 “목마른 사슴이 시냇물을 찾아 헤매듯이" 주님의 은혜를 사모했다.

하나님의 은혜는 사모하는 자에게 가깝다고 했던가? 1930년 1월 10일, 마침내 그녀는 “눈과 같이 깨끗 하라!"는 주님의 생생한 음성을 처음으로 듣게 되었다. 그녀는 그날이 “참 나의 기쁜 거룩한 생일"이라고 고백했다. 또한 이튿날 새벽에는 “어디로서인지 손뼉 치는 소리의 세 번 부르는 음향을 듣고 혼자 새벽기도회에" 나갔다. 그 걸음은 참으로 “아아! 기쁨에 넘치는 걸음"이었다.

이후 그녀의 삶은 완전히 변화됐다. 삶의 방향도 완전히 달라졌다. 전도는 그녀의 삶이 되었다. 하나님의 신비와 기쁨을 깊이 맛본 자만이 진정으로 한 생명의 소중함을 알고 전도에 깊이 헌신할 수 있다고 했던가! 그녀의 삶이 바로 그랬다. 동료 교사들과 함께 전주 거리를 다니며 복음을 전하는 그녀의 모습은 낯익은 풍경의 되었다. 학생들에게는 미소를 잃지 않고 다가서는 사랑의 교사가 되었고, 가난하고 병들고 소외된 자들에게는 친구와 어머니가 되어 주었다. 그녀의 손길이 닿는 곳마다 상처가 치유되고 슬픔의 그림자가 떠나가며 새로운 생명력이 용솟음쳐 올랐다. 

방애인은 그녀를 찾는 흉측한 모습의 나병환자들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녀는 “문둥병을 더럽다 하지 아니하고 24세 처녀의 손으로 그들의 썩어가는 살결을 어루만지며" 뜨거운 눈물로 기도했다. “주여! 이들의 죄를 용서하시고 주의 능력과 사랑이 내 손을 통하여 이 괴로운 병에서 구원하여 주옵소서. 주님이시여, 자비와 긍휼을 아끼지 마시옵소서." 이 간절한 기도는 상처로 깊은 골이 생긴 그들의 마음깊이 그리스도의 씨로 심겨졌으며, 그들의 손등에 떨어지는 눈물은 그들의 썩어가는 살을 소생케 했다. 이처럼 시간과 장소 그리고 상대를 가리지 않는 헌신적 희생과 사랑을 실천하는 그녀의 모습은 점차 성자처럼 사람들의 눈에 비치기 시작했다.

하지만 갑작스러운 건강의 악화로 찾아온 장티푸스를 이기지 못하고, 그녀는 결국 1933년 9월 16일 24세를 일기로 사랑하던 지인들의 곁을 떠나 영원한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갔다. 그녀의 장례는 전주시민 전체의 애도 속에 엄수됐다.

교회를 향한 불신의 악취를 풍기던 사회 속에, 결코 사라지지 않는 예수의 향기를 진하게 뿌려 놓았던 것이다. 영성을 외치면 크게 외칠수록 겉만 더 번지르르 해져 가는 오늘의 세태와 얼마나 다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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