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에서 가장 중요한 책, 성경책!

한국교회는 1884년을 그 원년(元年)으로 잡는다. 하지만 실제로는 이전에 이미 기독교 복음이 국내에 들어와 자생적 공동체를 형성하고 있었다. 국외에서도 몇몇 한국인들이 기독교로 개종한 후 성경 번역과 선교사 유치운동 등을 벌이며 복음전파 활동을 펼치고 있었다.

그들 가운데 이수정(李樹廷, 1843~1886)의 개종과 활동은 특히 주목할 만하다. 그는 “조선교회의 선구자"로 알려져 있으며, 한국의 기독교 수용과 관련해 몇 가지 점에서 크게 공헌했다. 무엇보다 그의 성경번역을 들 수 있는데, 이후 한국교회가 성경중심의 신앙을 구현할 수 있는 하나의 토대를 제공했다.

개종 후 이수정의 최대 소망은 성경을 민족에게 주는 것이었다. 이것은 자신의 회심에도 결정적으로 작용했던 신비한 꿈이 계기가 되었다. 1882년 9월, 이수정은 신사유람단의 비공식 수행원으로 일본에 건너갔다. 일본의 개화된 선진문물과 농업기술을 시찰하고 연구할 목적이었다. 그 여정에는 세계적인 농학자 츠다센(津田仙) 박사와의 만남도 잡혀 있었다.

츠다센 박사는 자신을 찾아온 이수정에게 신약성경을 선물하며 한번 읽어볼 것을 권했다. 그 성경을 읽던 중 이수정은 이상한 꿈을 꾸게 되었다. 꿈속에 두 사람이 나타났는데, 한 사람은 키가 크고 다른 사람은 작았다. 그들은 이수정에게 자신들이 걸머지고 온 보따리를 벗어 주었다.

“이것이 무엇이오?" / “책이요." / “이 책이 무엇이오?"
“당신네 나라의 모든 책들보다도 가장 중요한 책이요."
“그게 무슨 책인데 그러시오?" / “성경책이요."

꿈에서 깨어난 이수정은 큰 충격을 받았다. 그 꿈이 마치 하나의 신비적인 계시처럼 여겨졌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이수정이 기독교를 받아들였고, 1883년 4월 29일 부활절에는 세례도 받았다. 그때 그의 나이 40세였다. 아직 조선정부가 기독교 수용을 완강히 거부하고 있었고, 그가 정부의 고급 관료였다는 사회정치적 신분을 생각한다면, 이수정의 세례는 목숨을 걸었던 것과 진배 없었다.

이수정은 이후 “조선의 복음화를 위해 성경을 번역하라"는 하나님의 음성과 루미스 선교사의 제안으로 성경번역에 착수했다. 그는 가톨릭 선교사들이 우리민족에게 성경의 말씀을 맛보지 못하게 한 것은 중대한 잘못이라고 생각했다. 이에 그는 무엇보다 성경을 우리민족에게 주고자 했다.

이수정의 성경번역은 소위 현토성경(懸吐聖經)의 형태로 시작되었다. 한문성경에 ‘토를 다’는 이른바 한한성경(漢韓聖經)으로, 한국의 식자층에게 인기가 있던 방법이다. 1883년 5월에 시작된 현토성경은 그해 6월말까지 신약 전체를 완성할 수 있었다. 이어 그는 한글성경 번역에 착수했고, 마가복음 번역본이 1885년 2월 요코하마에서 1천부 발행되었다.

마가복음의 출판은 한국 선교사로 임명된 언더우드와 아펜젤러가 일본에 도착하는 때를 맞춘 것이었다. 두 사람은 이수정에게 2개월 간 한국어를 배웠고, 그해 4월 5일 부활절에 제물포에 도착했다. 이때 그들의 손에는 바로 이수정이 번역한 마가복음이 들려 있었다. 이수정의 성경번역이 내한 선교사들이 보다 빠르고 쉽게 선교활동을 벌일 수 있는 토대를 구축해 준 셈이다.

이처럼 한국의 기독교 수용은 먼 이국땅에서부터 착실히 준비되고 있었다. 물론 그 중심에는 성경이 크게 자리하고 있었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믿음의 실체를 체험한 복음의 선각자들이 겨레의 미래를 위해 무엇보다 성경보급이 시급함을 깨달았던 것이다.

그런데 최근 한국교회는 민족의 선각자들이 가졌던 성경의 가치와 그 비전을 놓치고 있는 것 같다. 한국 기독교인들은 성경의 가치에 대해 초기 선각자들이 가졌던 겸손한 혜안(慧眼)을 회복해야 할 것이다.

* 이번호부터 허명섭 목사(시흥제일교회)의 교회사 산책이 새로 연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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