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카이오쉬네를 실현하자! “ dikaiosuvnh”

도대체 정의란 무엇일까? 하버드대학의 마이클 샌델(M. Sandel)이 철학적 윤리로 이름을 떨치고 있어서 그런지 요즈음 세간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그의 책을 손에 들고 다니지만, 정작 정의가 무엇인지 개념이 잘 잡히지 않는 것 같다. 더욱이 지적 허영심이나 보상심리 혹은 대리만족이 아니기를 바랄 뿐이다. 그렇다면 성서에서는 정의를 무엇이라고 말할까?

특히 신약성서 곳곳에서 정의 혹은 의(dikaiosuvnh, 디카이오쉬네)가 92번 등장한다. 그렇다면 성서에 나오는 “의”(정의, righteousness)라는 개념도 고대 그리스 언어나 문화의 영향을 받아서 그 의미가 전달되었을 것이다. 먼저 플라톤(Platon)의 『국가』라는 역작을 통해서 그 뜻을 가늠해 보는 게 순서일 것이다. 플라톤이 정의를 말할 때는 “잘 사는 것”(훌륭하게 사는 것), “행복하게 사는 방식”과 매우 밀접한 연관이 있다. 좀 더 풀어서 말을 한다면, 정의는 인간의 영혼이 올바른 상태에 있음, 영혼이 제 기능을 제대로 수행할 수 있도록 해주는 ‘올바른 상태’(올바름)를 의미한다. 물론 여기에서 올바름이란 인간적인 훌륭함을 일컫는 것이다.

고대 그리스에서는 나라(polis)나 공동체(koinonia)의 구성원으로서 인간은 자신의 기능과 구실을 잘 할 수 있도록 해야만 했다. 더 나아가서 플라톤은 정의를 사회 정의와도 연관 지어서 설명을 한다. 국가 혹은 공동체에서 구성원들의 행복은 자신의 일, 자신의 기능, 자신의 것을 통해서 자기 자신답도록 해주는 데에 있다. 인간이 저마다 자신의 것을 소유하고 자신의 일을 함으로써 자신의 성향대로 살아가도록 하는 것이 올바른 것이다. 그렇지 못할 때는 올바르지 못한(adike) 것이 되는 것이다.

또한 올바른 것이란 신체의 건강과 질병과도 관계가 있다. 올바름과 올바르지 못함은 제 기능을 제대로 해내는 것과 관련이 있다고 할 때, 그것은 건강한 마음의 상태에 있을 때에야 가능한 것이다. 따라서 올바름이란 참된 자기, 자신의 일을 하면서 자신을 조절하고 자신을 지배해서 전체적인 조화, 화목을 이루는 것이다. 그런 성격 상태(습성, hexis)를 유지시켜 주고 도와서 이루게 하는 것이 올바름이다.

이와 같이 정의란 올바른 것, 훌륭한 것인데,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공동체 안에서 자신이 맡고 있는 일이나 기능 등을 성실하게 이루려고 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와 같은 플라톤의 입장에 반기를 든 사람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고대 그리스 철학자 트라시마코스(Thrasymachos)였다. 그는 “올바른 것(정의)은 강자의 편익이다”고 주장하였다. 어쩌면 하나님의 나라에서 정의란 평등한 사회를 말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예수께서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dikaiosuvnh)를 구하라”(마 6:33)고 했을 때, 그리스도교 공동체 혹은 하나님의 나라에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올바른 삶, 훌륭한 삶을 추구하라는 것이었다.

공동체 속에서 자신에게 맡겨진 일을 성실하게 실천하고 전체와 조화 및 화목을 이루면서 살아가는 이상을 말한 것이다. 따라서 자칫 그리스도인이 의를 실천하면서 살지 못한다면, 플라톤에 맞서 정의란 강자에게만 있다는 트라시마코스의 반론이 지금이라도 당장 제기될 것이다.

따라서 오늘날 교회는 진정으로 하나님의 정의를 말하고 동시에 실천하고 있는지를 반성해야만 한다. 교회 공동체뿐만 아니라 세계 전체와의 관계성 속에서 교회의 역할, 즉 교회가 교회로서의 제몫을 감당하고 약자의 몫을 대변해 줄 때 사회 정의와 세계 정의의 실현에 기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스인들은 자연과 사회도 그의 존속과 존립을 위해서는 그것을 스스로 지킬 수밖에 없는 기본틀 즉 정의(의)가 필요하다고 생각하였다.

물론 인간이란 존재는 그것이 아니라도 인간의 한계로서 가지고 있는 생존을 위한 기본틀 즉 굴레와 고삐라는 것을 완전히 벗어나기는 어렵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께서는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디카이오쉬네를 구하라. 그리하면 생존의 문제는 하나님께서 곁들여 책임을 져주실 것이라고 말씀을 하셨던 것은 아닐까?

하나님 나라의 질서,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존립, 그리고 사회적 삶의 질서를 유지하는 것이 가장 급선무라는 관계적 정의의 최상의 상태인 사랑을 실천하라는 것이었을 것이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요, 초대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최고의 윤리적 덕목이 아니었을까. 그런 의미에서 예수께서는 마이클 샌델보다 이미 2천년 전에 사람 사는 세상에 가장 어렵고 힘든 정의(디카이오쉬네)를 고민하신 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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