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 이슬람 화석’ 같은 모로코 페즈 … ‘불타는 열정’에 숨막혀

 

중세시대의 건축물과 현재의 삶이 조화를 이루는 페즈는 천년의 숨결을 간직한 ‘살아있는 이슬람 화석'과 같았다. 세계 최대의 미로 도시인 메디나가 옛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다. 페즈의 천연가족 염색공장과 페즈의 구시가 모습.
지난 7월 7일 모로코와 스페인, 네델란드 등 유럽학술탐방을 마치고 귀국길에 오르기 위해 암스테르담 공항에서 비행기 탑승을 기다리는데, 히잡을 쓴 두 여인이 기도하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탑승구에는 많은 사람들이 있었지만 그녀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휴대용 양탄자를 깔고 기도를 드렸다.
기독교의 본고장인 유럽에서 이런 광경은 더 이상 낯선 모습이 아니다. 유럽에서는 해마다 개신교 인구가 줄어들고 있는 반면 이슬람은 급속하게 늘어가고 있다. 기독교인들이 신앙에 걸맞은 삶을 살지 못해 ‘종교적 공백’을 만들었고, 기독교가 몰락한 그 자리를 이슬람이 급속히 채워가고 있는 것이다.

 

기독교와 이슬람의 역사적 만남

미로 도시 페즈 골목시장에서 유일한 교통수단인 나귀.

사실, 성경에 나오는 ‘땅 끝’은 지금의 포르투갈과 스페인지역이다. 그러나 아이러니 하게도 바로 이 땅 끝을 통해 이슬람이 유럽에 전해졌다. 당시 아랍의 칼리프들은 이슬람제국 영토 확장을 위해 유럽 쪽으로 서진했지만 강성한 동로마제국이 버티고 있어 북아프리카 지중해변을 따라 모로코와 지브롤터 해협을 거쳐 이베리 반도에 상륙했다. 711년, 아랍화 된 베르베인족을 앞세워 스페인 전역을 점령한 이슬람은 무려 800년 동안 이곳에 이슬람 문화를 꽃피웠다. 이때부터 기독교와 이슬람은 서로 물고 물리는 대립 속에서 불편한 공존 양상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화해할 수 없는 두 종교의 흔적에서 다시 기독교의 역사적 출발점을 모색하기 위해 남유럽과 북아프리카로 이어지는 학술 탐방에 나섰다. ‘기독교와 이슬람의 만남, 그 역사적 흔적을 찾아서’라는 주제로 진행된 여행은 두 종교가 처음 만난 이베리아 반도에서 본격화 되었다. 첫날부터 연착된 항공기 탓에 유라사아의 땅 끝인 포르투갈 로카곶 일정은 물거품이 되었다. 대신 스페인 세비아를 거쳐 유럽에 이슬람이 처음 전파되었던 지브롤타 해협에서부터 기독교와 이슬람의 만남의 역사적 흔적을 찾아 나섰다. 
지브롤터 해협은 남북으로 유럽과 아프리카 대륙이 마주보고 있고, 동서로는 지중해와 대서양이 만나는 곳이다. 유럽과 아프리카 두 대륙은 이 해협을 사이에 두고 기독교와 이슬람의 문화를 주고 받고, 때론 정복과 지배의 전쟁을 벌여 왔다.

 

유럽의 관문, 지브롤터 해협
지금은 거대한 고속정 페리호가 스페인과 모로코 사이를 이어주고 있었다. 그런데 페리에 오르는 순간 이미 이슬람 땅을 밟은 듯 했다. 배안에는 차도르와 히잡을 쓴 이슬람 여성들로 가득했다. 순간, 가슴이 덜컹 내려앉는 느낌이었다. 많은 이슬람인들을 한꺼번에 만나는 것이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잠깐이지만 일종의 문화 충격 같은 것이었다. 충격은 이뿐이 아니었다. 배 안에는 이슬람 모스크도 있었다. 사원처럼 화려하게 꾸며진 것은 아니지만 코란이 있었고, 그곳에서 기도하는 사람도 있었다. 스페인 최남단 타리파에서 출발한 페리가 모로코 탕헤르 항에 도착하는데 걸린 시간은 불과 1시간 남짓. 그 짧은 시간조차도 그들은 자신들의 신앙을 놓지 않았던 것이다. 배에서 한눈에 들어오는 탕헤르의 경관은 이국적이었다. 지중해 언덕, 특유의 하얀색 집이 파란 문과 어울려 낭만적인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지중해를 사이에 두고 유럽과 아랍의 문화가 모로코에서 만난 것이다. 아프리카에서 유럽으로 통하는 유일한 관문이었던 모로코는 유럽의 문화와 아랍의 문화가 충돌하면서도 서로 융합하는 곳이었다. 지리적으로는 아프리카에 속하고 유럽의 영향을 받고 있었지만 모로코 인의 99%가 이슬람이다. 기독교 문화의 영향권에 있었지만 아랍 문화와 이슬람이 그곳을 지배하고 있었다.

삶 속 녹아든 이슬람의 신앙
탕헤르에서 페즈로 향하는 길에서도 생활 속에 녹아 있는 이슬람을 만날 수 있었다.
여섯 시간에 이르는 여정 속에 몇 차례 휴게실을 들렀는데, 거기에서는 어김없이 작은 모스크가 있었다. 우리들에게는 그저 쉬어가는 휴게실이었을 뿐이었지만 그들에게는 자신들의 신을 만나고 예배할 수 있는 영혼의 안식처였던 것이다.
간이사원과 함께눈에 띄는 곳은 화장실이었다. 다소 지저분 한 화장실에는 발과 몸을 닦을 수 있는 별도의 세면시설이 있었다. 예배 전에는 반드시 몸을 청결히 닦아야 하는 의식을 치러야 하기 때문이다. 이를 ‘우두’라고 한다. 우두를 행하지 않으면 예배를 볼 수 없고 만약 우두 없이 예배를 드리면 그 예배는 무효가 된다고 한다.
무슬림 지역을 여행할 때, 화장실 바닥이 물에 젖어 있거나 질퍽하게 더럽다면 근처에 사원이 있다는 증거다. 흙과 먼지를 씻어내야 하는 모로코의 화장실은 지저분할 수밖에 없다. 가장 더럽고 지저분한 곳에서 그들의 철저한 의식이 시작되었고 이것이 휴게소라는 공간에서도 이슬람의 신앙을 불붙게 한 것이다.
 
중세의 이슬람의 거대한 화석-페즈


중세시대의 건축물과 현재의 삶이 조화를 이루는 페즈는 천년의 숨결을 간직한 ‘살아있는 이슬람 화석'과 같았다. 아랍풍의 타일 장식과 전통의 기하학적인 문양들로 꾸며진 벽면, 그리고 화려한 금속세공이 수놓은 옛 왕궁도 있었고, 세계 최대의 미로 도시인 메디나가 옛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다.
세계문화유산인 페즈의 메디나(Fes el Bali)는 14세기 이슬람 특유의 도시 설계 방식으로 무려 7천∼9천 개의 골목 시장이 미로를 형성됐다. 두 사람이 겨우 비켜갈 정도의 좁은 골목길은 현지 가이드가 앞장서서 큰 목소리로 ‘오른쪽, 왼쪽’하며 안내하지 않으면 길을 잃어버리기 십상이다. 좁은 골목길 양편에는 각종 과일과 물건을 파는 옛날 건물들이 빼곡히 들어서 있고, 그 좁고 매캐한 냄새가 가득한 골목길은 많은 사람들과 유일한 운송 수단인 당나귀가 메우고 있다.
그런데 이 복잡한 골목길에도 넓은 곳이 있다. 바로 골목안 이슬람 사원이다. 일을 하다가도 시간이 되면 사원에서 메카를 향해 기도를 하는 곳이다. 어두컴컴하고 휑하게 넓은 모스크 안은 좁은 골목과 대비가 되었다. 사원에는 예배에 몰두하는 사람들이 보였고, 어떤 골목에선 예배를 드리고 빠져나가는 사람들로 붐볐다. 우두를 위한 세면장도 사원 입구에 자리 잡고 있었다.
모로코의 복잡한 미로는 일종의 도시를 방어하기 위한 것이라고 하는데, 결국 자신의 종교를 지키기 위한 최후의 수단이었다. 복잡한 미로 속에 그들의 신념은 시들지 않았고, 그 덕분에 1000년의 전의 고유한 신앙을 지금까지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성과 속이 하나가 된 이슬람
이런 신앙이 물들어 있어 천년 빛깔의 이슬람 전통과 문화가 지금까지 페즈메디나에서 오롯이 살아 숨 쉴 수 있는 듯 했다. 사실, 메디나는 원래 이슬람 사회에서 ‘메카'와 더불어 성지로 불리지만 지금은 사원과 시장으로 형성된 구도심을 지칭하는 말로 일반화 됐다. 이곳 이슬람에서는 ‘성'과 ‘속'이 구별되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하나로 묶어져 있었다. 다른 문명의 지배 속에서도 자신의 종교를 지켜야 했고, 전쟁을 통해 자신들의 종교적 이념을 끊임없이 전파해야 했던 이슬람의 입장에서 성과 속은 결코 양분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사람이 있는 곳에는 언제나 사원이 있고 장소와 이유를 불문하고 메카를 향해 하루 다섯 번씩이나 절을 하는 그들이 신앙이 자리 잡고 있었다.
미로 속을 빠져 나온 뒤 모로코의 맑고 파란 하늘을 다시 만날 수 있었다. 그러나 미로 속 보다 가슴이 더 답답해졌다. 숨 막힐 정도의 불볕 더위 때문만은 아니었다. 열사의 땅, 모로코 고대 도시에서 이글거리는 이슬람인 들의 불타는 열정 때문이었다. 이슬람이라는 종교는 이렇게 천년을 넘게 불타고 있는데, 바다 건너에 있는 기독교의 땅, 유럽은 남은 신앙마저도 퇴락하고 있다고 생각하니 발걸음이 무거워 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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