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의지할 곳은, “피스티스”(p i vstis)
세계 지구촌 곳곳은 그야말로 아수라장이 따로 없는 것 같다. 우리나라만 하더라도 구제역의 흉마가 이 땅 곳곳을 훑고 지나가고 이제 매장지에서 흘러나오는 오염수를 걱정해야 할 판이다. 이집트를 비롯하여 중동과 수단 등 아프리카 국가들은 민주화의 열병으로 갈등을 겪고 있다.
혼란스러운 시대, 신뢰의 대상을 찾아서
고대 그리스나 로마에서도 이처럼 혼란스러운 시대에 의지하고 신뢰할 수 있는 대상을 찾았다는 흔적이 있다. 이른바 “믿음” 즉 피스티스(p i vstis)다. 물론 고대 철학에서 피스트(pist-)로 시작되는 단어는 원래 종교적인 용어는 아니었다. 다만 철학에서는 회의론이나 무신론과의 논쟁에서 신들에 대한 믿음과 그러한 믿음의 독특한 확실성에 대해 언급할 때 사용되던 개념이었다.
헬라적인 의미에서 ‘피스티스’라는 말은 순종이나 계약관계를 지칭하는 말이었다. 더 나아가서 이 개념은 의지하는, 신뢰할 수 있는, 성실한, 확신, 담보나 맹세의 보증을 의미하는 데까지 확장된다. 스토아철학에서는 의뢰, 인격의 신실함 또는 성실함을 뜻하는 말이었고, 이것은 신과 같이 인간도 신실해야 하며,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신실해야 된다는 뜻으로 쓰였다.
그렇다고 고대철학에서 이 단어를 신과 전혀 관계가 없는 것으로만 생각하지 않았다. 인간은 보이지 않는 믿음의 지식에 의해 이끌려져야 한다고 생각했고 그들은 신을 믿는다는 것은 신의 섭리를 믿는 것과 동일시하였다. 더군다나 믿음 혹은 신앙이란 신뢰나 신뢰의 가능성, 그리고 신앙을 창조하는 것으로 보았다. 흥미로운 것은 믿음이라는 것을 사람들과의 신뢰성 즉 우정(필리아, philia)과 동일 한 것으로 여겼다는 것이다.
고대 그리스 철학의 영향을 받았던 성서의 저자, 그 중에서도 사도 바울은 이 용어를 차용하여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 순종, 소망, 성실함 등으로 그 의미를 확장시켰다. 성서의 저자들은 고대 지중해 세계의 철학적 개념을 종교적으로 차용하여 인간은 그리스도에 대해서 전적인 신뢰를 해야 하며, 그리스도와 성실한 관계를 지속하고, 그 분만을 의지해야 한다는 개념으로 새롭게 번안했다는 것은 훌륭한 일이다. 따라서 종교적인 개념이든 아니면 철학적인 개념이든 믿음이란 ‘관계’를 나타낸다는 것만은 확실한 것 같다.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서 빚어지는 올바른 관계가 바로 믿음이라는 것을 나타내고자 한 것이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올바른 관계
우리는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면서 단지 보지 않고 믿는다거나 보이지 않는 신적 존재를 믿음으로 인식하는 것, 혹은 물질적으로 지금은 풍요롭지 못하지만 장차 미래에는 나아질 것이라고 믿는 것 등을 믿음 내지는 믿음의 총체라고 생각을 한다. 그러나 믿음이란 그리스도와의 관계 즉 그리스도에게 신뢰하는 것, 그리스도에게 의지하는 것, 그리스도에게 소망을 품는 것, 그리스도에게 성실함이라는 것을 다시 한번 상기할 필요가 있다. 더불어 거기에는 어떠한 물질적인 관계, 미래의 보상과 과잉된 축복을 말하지 않는다는 것도 알아야 한다.
지금 우리나라는 구제역이라는 초유의 국가적, 국민적 재난을 겪고 있다. 가장 마음이 아픈 사람은 그 누구보다도 동물을 가족처럼 애지중지 길러왔던 사람들일 것이다. 이러한 사태에 대해서 함께 마음을 아파하고 슬퍼하면서 염려를 하고 있는 분이 계시다면 단연 그리스도이시다. 그분은 우리뿐만 아니라 전우주의 구원자이자 모든 피조물과 사랑의 신뢰, 성실한 우정을 쌓으셨던 분이 아니시던가. 이제 이럴 때 일수록 그리스도인이 해야 할 일은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회복하고, 우리의 의지와 소망이신 그분에게 간절히 기도하는 태도가 필요하다. 그 어느 때보다 지금 절실한 믿음, 즉 피스티스가 필요한 때인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