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눅 12:49) - (추억의 나무난로)

예수님은 이 땅에 불을 던지러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왜 그토록 간절히 이 땅에 불을 붙이려 하셨을까? 그 불의 의미는 무엇일까? 이 말씀을 한 줄 읽고 잠시 성경책을 밀어놓고 난로에 나무 한 조각을 던져 넣었습니다.

유난히 추웠던 올겨울, 우리를 더욱 춥게 만든 것은 치솟는 기름 값이었습니다. 특히 난방용 등유가격의 상승은 우리교회의 난방에 치명적인 영향을 끼쳤습니다. 생각다 못해 나무난로를 놓기로 했습니다. 수소문 끝에 난로를 찾아 설치를 했습니다. 그런데 나무난로를 운용하는 것이 그리 쉽지 않았습니다.

땔감을 준비하는 수고는 그렇다 치고, 예배당이 따뜻하려면 적어도 한 시간 전에는 불을 피워야 했습니다. 다음 날부터 나의 고행은 시작되었습니다. 새벽 4시부터 예배당에 나와 불 피울 준비를 하고는 난로 안에 들어있는 나무에 불을 붙였습니다. 100mm 함석 연통을 타고 연기는 눈 내리는 하늘로 올라갔습니다. 신도시 속에 웬 굴뚝연기냐고 속내를 모르는 사람들은 지나가면서 한 마디씩 하지만 난 그저 감사하고 또 감사했습니다. 이렇게 따뜻하게 겨울을 날 수 있다는 것이 말입니다.

그런데 난로에 불을 피우면서 여기에도 엄연히 물리학적 법칙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장작에 불을 붙이려면 밑불이 좋아야한다는 것입니다. 나는 19공 번개탄을 맨 밑에 놓고 그 위에 장작을 쌓아놓았습니다. 번개탄은 최장 두 시간은 타기 때문에 나무에 완전히 불이 붙을 때까지 든든히 밑불을 지켜줍니다.

요즘 새롭게 불기 시작한 교단의 전도 열기를 높이는 것은 교단의 성장과 지교회의 부흥과 더 나아가 한국교회에 밑불역할을 하기에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때로 망각하고 있는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으라”는 주님의 대사명을 다시금 일깨우는 신앙의 중요한 지표가 아닐 수 없을 것입니다.

두 번째는 굵은 장작이 화력도 좋고 오래 탄다는 것입니다. 얇은 나무는 불은 쉽게 붙지만 오래가지 못하고 금방 사그라져 버립니다. 일시적인 캠페인이나 운동으로서가 아니라 전도의 불길은 우리교단과 교회의 장기적인 마스터플랜이 되어야 합니다.

세 번째는 무엇보다 중요한 산소입니다. 밑 아궁이를 막으면 산소가 차단되어 높은 화력을 내지 못하고 대신에 연기만 잔뜩 뿜어 올립니다. 끊임없이 산소가 공급되어야 화력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작게는 개인의 신앙에 있어서도 이러한 법칙은 적용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예수님께서 그토록 간절히 원하셨던 그 불은 성도와 교회의 심장 속에 주님을 사랑하고 세상을 향한 뜨거운 구령의 불길이 아니었을까 헤아려 봅니다. 처음신앙의 열정에 비춰본 지금 나의 모습이 너무 부끄러워 현실과 상황 속에 핑계로 깊이 묻어버린 우리의 모습을 다시금 일깨워야 한다는 마음입니다.

불신과 증오로 가득 찬 영적 빙하기에 살고 있는 요즘 사람들은 모두 문을 굳게 닫은 채 이웃과 단절된 삶을 살고 있는 것 같습니다. 더군다나 낯선 얼굴의 성도가 오면 반가운 마음이 앞서야 되는데 혹시 이단에서 온 것은 아닌가하는 의심부터 하게 됩니다. 이미 교회 안에서도 구령의 열기에 찬물을 끼얹는 현상들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적 혹한기에 뜨거운 불을 찾아 달려오는 세상의 버림받고 소외된 영혼들이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전도의 불길이 과거 한 때 불었던 일시적인 현상이 아니라 지금도 그리고 미래에도 우리에게 지속적으로 주어진 미션이라는것을 명심해야겠습니다. 전도의 불길이야말로 우리의 생존이자 존재의 의미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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