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사와 섬김의 원리, “ diakoniva”(디아코니아)
요즘 교회는 비난의 도마 위에 올라서 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스스로의 잘못 때문이라는 지적에 할 말이 없다. 아마도 그것은 성서에 나와 있는 대로 세상을 향한 교회의 봉사와 사랑이라는 본질이 퇴색되고 있기 때문이다. ‘봉사’나 ‘섬김’을 의미하는 헬라어는 “디아코니아”(diakoniva, 신약성경에 34번 등장)이다. 앞서 말한 것처럼, 이 단어는 이웃을 향한 봉사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마태복음에는 작은 자를 위해 교회가 봉사하고 섬겨야 한다고 말한다(마 10:42, 25:40).
여기에서 파생된 용어가 집사(디아코노스, diavkonos)라는 교회의 직분이다. 그 최초의 집사 임명식이 사도행전 6장에 기록되어 있다. 7명의 집사는 말 그대로 “다른 사람의 명령을 수행하는 사람”, “조수”, “종”을 일컫는다. 특히 로마서 16장 1~2절에는 이 “디아코노스”가 “일꾼”으로 번역이 되는데, 그 등장인물이 뵈뵈(Phoibe)라는 여성이다. 그녀의 이름이 그리스 신화에 종종 나오는 것으로 볼 때 그녀가 이방인이었을 가능성을 암시한다.
이때 “디아코노스” 즉 일꾼은 때에 따라서는 여성명사 혹은 남성명사로 쓰이는데, ‘사역자’, ‘섬기는 자’, ‘식탁에서 시중드는 자’, ‘집사’ 등을 나타낸다. 그렇다면 뵈뵈는 단순한 여집사 정도가 아니라 교회의 모범된 일꾼, 책임자, 교회의 든든한 후견인, 이웃 사랑에 선봉에 서는 여장부로 보아야 할 것이다. 물론 학자들 중에는 “디아코노스”가 제도화된 교회의 한 직책으로서 집사(deacon) 혹은 여집사(deaconess)로 정착된 것은 비교적 후대의 일이었을 것(딤전 3:8~13 참조)이라고 주장한다.
그러고 보면 오늘날 한국교회 내에는 (여)집사 직분을 갖고 있는 분들이 많이 있다. 일을 좀 한다 싶으면 집사 아니던가. 그런데 그들이 교회 내외에서 단순 봉사나 허드렛일을 하는 정도에 지나지 않는 신자로 여기면 안 된다. 성서에 나와 있는 대로, 그리고 초대교회 전통에서는 집사를 성직의 직제(副祭나 輔祭)로 여길 만큼 대단한 봉사와 섬김을 하던 직분이었음을 상기해야 할 것이다. 또한 집사라는 직분을 가진 신자들은 그에 걸맞게 하나님과 교회를 섬기고 봉사하는 목회자의 보조 사역자의 몫을 톡톡히 감당해야 한다.
수많은 그리스도인들 중에서도 집사라는 직분이 갖는 참다운 의미는 섬김과 봉사를 실천하면서 사랑을 드러내는 성도의 모습이라 하겠다. 그렇다면 세상은 집사가 참 일꾼으로서 식탁에서 시중을 드는 것처럼 세계를 섬기고 봉사하는 지를 보려고 할 것이다. “집사님!”하고 부르는 소리에 뒤를 돌아보는 신자가 많아진다는 것은 좋은 일이다. 그러나 그 숫자가 많아지는 만큼 세상의 섬김과 봉사의 몫도 커져야 한다는 것 또한 잊지 말아야 한다. 집사는 이름이나 신분이나 계급이 아니라 섬김의 도, 봉사의 도, 사랑의 도를 보여주어야 하는 책임감 있는 직분이기에 더더욱 그렇다. 그러므로 올 한해 이러한 집사들의 힘겨운 토끼 뜀박질이 한국교회의 쇄신과 성숙의 호기가 되기를 빌어 본다.
교회는 크게 나누어서 하나님에 대한 봉사 즉 예배(leitourgia)를 잘 해야 하며, 이웃에 대한 봉사(diakonia) 즉 사랑을 할 줄 아는 공동체여야 한다. 이 둘은 어느 하나도 소홀히 할 수가 없는 교회의 중요한 역할이요 사명이다. 세상은 어김없이 토끼를 잡기 위해서 사냥개를 동원할 것이다. 처음에는 토끼를 잡기 위해서 사냥개를 이용하지만, 정작 토끼를 죽인 후에는 사냥개도 잡아먹으려고 하는 것이 세상이다. 우리는 그것을 토사구팽(兎死狗烹)이라고 한다. 교회가 이것을 망각하고 이번 한 해를 지나려고 한다면 세상으로부터 토사구팽을 면하기 어려울 것이다. 토끼처럼 귀를 쫑긋 세우고 열심히 달리되 자신을 뒤쫓는 사냥개 또한 늘 경계를 해야 할 것이다. 토끼의 생명은 바로 디아코니아에 있다는 것을 명심한다면 사냥개쯤은 아무것도 아니리라. 스데반과 같은 순교와 뵈뵈와 같은 여장부의 디아코니아 정신을 잊지 않는다면 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