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의 소식으로서의 창조

우리들이 살고 있는 이 우주의 공간과 역사의 시간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옛날 사람은 어렴풋이 창조주로부터 발생했다고 믿었다. 시대가 바뀌면서 사람들은 엄청난 관측기구와 놀라운 계산 능력을 갖고 우주를 재기 시작하였다. 각종 첨단장치를 통하여 온 우주를 과학적 대상으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이제 우리에게 하나님의 창조를 이해하는 것은 더 어려운 과제가 됐다.

과학적 우주기원 이상의 의미
우리가 하나님의 창조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 무엇보다도 먼저 우리는 성서가 증거하는 창조를 과학적 우주 기원론으로 환원시켜서는 안된다는 점을 주의해야 한다. 우주의 첫 번째 순간은 그 무엇으로도 표현이 부족할 웅장하고 경이로운 서사의 첫 장면이기에 그것을 가장 먼저 생각하는 것은 인지상정이다. 무에서 하나님이 온 세상을 창조할 때 있었던 첫 순간이 기적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성서는 물론이고 초대교회의 교부들이 창조의 첫 장면을 이렇게 무로부터의 창조나 원창조라고 부를 때에 하지만 지금처럼 과학적 우주 기원론의 첫 장면만을 말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오늘날 창조라는 말을 듣자마자 많은 현대인들이 상상하는 바는 무엇인가? 가모브(G.A.Gamov, 1904~1968)가 우주에 널려있는 수소와 헬륨의 원인을 설명하기 위해서 논리적으로 다가설 수밖에 없던 결론, 빅뱅(Big Bang)의 첫 시작을 생각하는 것이다. 그렇게 사람들은 과학시대의 천체물리학과 양자역학의 결과로서 주어진 이 빅뱅의 첫 시작을 하나님의 창조와 동일시하고 있으면서 그것을 신앙의 전부처럼 여기는 것이다. 아무리 설명을 해도 이 사실을 바꾸지 못한다. 자연스럽게 그렇게 연결되고 있다. 성서가 지적하는 창조의 섭리는 이 우주기원론의 천체 물리학적 사건보다는 훨씬 더 많은 것을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경륜 속의 창조
어떻게 그런가? 빅뱅도 이 자연과 우주가 우리가 알 수 없는 다른 원인에 의한 출발을 갖고 있다고 말하지 않는가? 빅뱅에서 제시되는 우주론은 현존의 질서가 무와 같은 사실로부터 시작되었다고 말하기에 자연스럽게 성서의 창조의 기사를 간접적으로 증거하고 있지 않는가? 맞는 말이다. 하지만 빅뱅과 창조를 동일시할 때 갖는 유효함은 거기까지이다. 만일 우리가 창조를 신앙의 유산으로 생각하면서 얻어야 할 유산이 이

첫 번째 사건의 과학적 해명에 대한 것이 전부라면 그것만을 주장해도 좋을 것이다.
사실 이 빅뱅이 우주의 시작을 중립적으로 지적해주길 바라지만 좀 자세히 볼 때 이것도 다양하게 해석되는 것이 사실이다. 이것은 물리학적 지평에서 벌어지는 많은 풀이의 과정에서 인간에 의하여 고안된 원인인 것이다. 수학의 바다에서 주어졌고 그 속에서야 제대로 그 의미를 다 알 수 있는 매우 고차원의 방정식의 해가 바로 이 빅뱅인 것이다. 그러니까 이 빅뱅을 신앙의 진술로 받아들이는 것은 위험천만한 일이다. 단지 우리는 이것을 고맙게 활용하기만 하면 된다.

우리가 이토록 창조를 우주의 첫 시작에 대한 물리적 해명으로만 만족할 수 없는 더 깊은 이유는 어디에 있는가? 성서에 의하면 창조라는 사건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창조하시는 하나님이 이 모든 것의 중심이 되시기 때문이다. 창세기를 비롯해서 시편과 각 예언서들, 그리고 느헤미야 7장의 신앙적 고백을 살펴보라! 성서의 관심은 이 우주의 처음뿐만이 아니라 지금 우리주변에서 일어나는 모든 현실들, 그리고 종말론적 완성까지 다스리시는 하나님을 말하고 있다.

창조는 바로 우리를 구원해주시는 하나님의 경륜을 의미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동행하시기 위해서, 우리를 구원해주시고 하나님을 닮아가도록 우리를 창조하신 것이다. 창조의 하나님은 지금 여기에서 우리를 안위하시면서 구원해주시는 간절한 소원을 갖고 계시며 이 하나님의 속사랑이 창조로 표현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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