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부음 받고 재림 기대하라
한 개인이 어떤 인생관, 가치관, 역사관 그리고 우주관을 갖는가 하는 것은 그 사람의 됨됨이(identity)뿐만 아니라 삶의 척도가 된다. 어떤 무신론적 철학자가 말한 것처럼, “인간은 우주 안에 맹목적으로 던져진 존재”라는 추리를 신념으로 삼는다면, 그 또는 그녀는 맹목적인 우주 안에서 맹목적인 존재로 맹목적으로 살다가 맹목적으로 사라질 수 있겠지만, 만일 성경의 진리대로 우주만물을 포함하여 우리 자신을 하나님의 창조물로 믿는다면 사정은 달라질 것이 자명하다.
또한 어떤 종교에서 가르치는 것처럼 역사는 처음도 끝도 없이 윤회하는 실재이며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이란 맹목적으로 윤회하는 역사의 수레바퀴에 순응하는 것이라는 믿음을 수용한다면 결국 그 또는 그녀는 나약한 숙명론자로 전락할 것이다. 그러나 성경이 가르치는 진리대로 역사에는 시작과 종말이 있으며 처음(알파)과 나중(오메가)이 되시는 하나님의 도덕적 심판이 있다는 사실을 믿는다면, 그 또는 그녀의 삶의 방식과 내용은 불신앙인 사람들의 그것들과는 확연히 구분되고 달라질 것이다. 그런 면에서 임마누엘 칸트의 도덕론적 신 존재 증명은 눈여겨 볼만하다.
성경의 약속은 크게 두 가지로 볼 수 있다. 구약에서 약속된 메시야의 도래는 예수의 성육신(D-day)에서 성취되었고, 신약의 약속은 예수의 재림(Second coming of Christ. 행1:11, 딛2:11~14 등)과 재림(V-day)에 따른 심판이다. 그리고 그 날(日)과 시(時)는 하나님만 아신다(행.1:7). 그러므로 교회는 디 데이(D-day)와 브이 데이(V-day)의 종말론적 긴장 안에 존재한다. 다시 말해, 교회(성도)는 주의 재림을 대비하되 매일 매일을 종말처럼 살아야 한다. 왜냐하면 오늘이 바로 종말일 수 있기 때문이다. 세대주의(Dispensationalism)처럼 미래의 시간을 마치 자(尺)로 분할하듯이 하여 각 시간대에 일어날 종말적인 사건들을 나열하는 해석적 접근은 문제가 있다.
우리는 오늘 어떤 자세로 살아야 하는가?
“때와 기한에 관해서는 너희의 알 바가 아니다”(행1:7)라는 말씀의 뜻은 종말을 대비하되 단지 병적(病的)으로 종말에 집착하지 말고 책임적이고 희망적인 자세로 살며 주의 일에 열심하라는 것이다(고전15:58. 딛2:14 등). 스피노자가 말했듯이, 신자는 “내일 세계의 종말이 오더라도 오늘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는 자세로 살아야 한다. 병적인 종말론의 영향을 받은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처럼 “종말이 오니까 일을 하면 뭐 하냐?”란 태도로 일도 하지 않아 교회의 폐가 되는 신앙 자세는 잘못된 것이다. “너희 손으로 일하기를 힘쓰라”(살전4:11).
마지막으로 우리가 열 처녀의 비유에서 받아들여야 할 중요한 진리가 있다. 혼인 잔치에 참여하게 된 지혜로운 다섯 처녀는 혼인 잔치에 들어가지 못한 어리석은 다섯 처녀들과는 달리 등에 쓸 기름을 넉넉히 준비했다는 사실이다. 기름은 성령 충만, 성령의 기름부으심을 의미한다.
성령의 기름부으심(Anointing of Holy Spirit) 안에 있는 신자가 예수의 재림을 기대하고 준비하고 있는 신자다. 그러므로 지금 우리가 서둘러 해야 할 일은 성령의 기름부으심을 받는 일이다. 그리고 초대교회가 했듯이 종말론적 기도(eschatological prayer)를 쉬지 않는 것이다: “마라나타, 주여 오시옵소서!”(계22:2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