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 죄악이여! “a;martiva”(하마르티아)
전 세계에서 소위 내로라하는 국가들이 모여서 G-20 정상회의를 치렀다. 그러나 G-20이 끝난 후 그 결과들이 무엇이었는지에 대한 평가나 반성은 커녕 언론조차도 입을 다물었다. 다만 옆 동네에서 벌어지는 광저우 아시안 게임이 연일 매스컴을 뒤덮고, 군대의 이런저런 사고사망 소식들, 그리고 대포폰에 대한 이슈 등이 뒤엉켜 국민들의 눈과 귀를 혼란스럽게 만들고 있다.
이런 사건 중 무엇보다도 최근에 사람들의 빈축을 사게 했던 사건이 있었으니, ‘봉은사 땅밟기’였다. 이러한 사람들을 향해 철학자 야스퍼스(K. Jaspers)는 ‘궁극적인 진리를 갖고 있다고 자부하는 사람들과는 대화나 교제도 할 수 없다’고 잘라 말하면서 따끔한 일침을 놓는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지금 벌어지고 있는 정치, 경제, 사회, 종교 등의 모든 분야에서 오만(傲慢, hubris)이 도를 넘어선 것 같다. 성서적인 관점에서 보아도 오만 즉 ‘선을 넘어선 것’은 ‘죄’(a;martiva)이다.
성서에는 죄를 가리키는 단어들이 여럿 등장하는데, 그 중에 우리에게 익숙한 ‘하마르티아’(a;martiva, 신약성서에서 173번 등장)는 원래 그리스 비극에서 오이디푸스가 부친을 살해하고 어머니와 근친을 하는 폐륜을 나타낼 때 사용되었던 말이다. 헬라어 ‘하마르티아’의 원래적 의미는 ‘과실’, ‘과오’, ‘잘못’ 등으로 번역되며, 적합한 히브리어로는 ‘하타아’(hattaah)에 가깝다.
이를 풀어쓰면, 창을 던질 때 “표적을 벗어남”, “목표에 적중시키려다 빗맞음”, “표적을 일탈함”이라는 뜻이다. 다시 말해서 인간의 비극과 불행은 자신의 과오나 실수 탓이라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이 헬라어의 개념을 차용하여 인간의 죄를 설명하려고 하였다. 즉 하마르티아는 하나님에 대한 신앙에서 벗어나는 것을 의미하게 된 것이다. 복음서에서는 그리스도인이 질서나 관습을 범한 사람 혹은 율법에 익숙하지 않거나 율법에 열심이 없는 사람을 하마르톨로스(hamartolos, 죄인)라고 하였다.
이외에도 죄를 의미하는 개념들로는 poneros(악한), adikia(불의, 부정), parabasis(위반), anomia(무법) 등이 있는데, 일반적으로 하나님이 인간들에게 의도하신 삶을 포기하거나 거부하는 것과 연관이 있다. 그렇다면 죄는 인간의 잘못으로 인해 야기된 비극적인 것으로서 하나님의 지시하는 뜻 혹은 삶에서 빗나간 것이지 도저히 고치지 못할 몹쓸 병이 아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는 그리스도가 계시지 않는가!
그렇다고 해서 그리스도를 죄라는 한계 상황에 처한 우리를 무작정 용서하시는 안전장치로만 여긴다면 안 될 것이다. 죄를 범하기 이전에 그것을 멀리할 수 있는 올곧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자유와 판단에 상응하는 무거운 책무가 뒤따라야 하지 않겠는가. 오늘날 지구 경제 전체를 불과 20%가 80%의 살림을 끌고 나간다고 호언장담하면서 오히려 약소국에게 불리한 경제정책을 강요한다면 그들의 소외를 어찌 감당할 수 있겠는가. 자신들의 이익을 앞세우는 자본가의 욕망과 자본주의 국가들의 탐욕, 탐심, 탐식을 어찌 보아야 하는가.
예수님은 약자를 사랑할 것을 누누이 강조하신 분이다. 약자의 아픔을 눈감지 말아야 하며 더 적극적으로 그들을 배려해야 할 것을 말씀하셨다. 이른바 선진국이라는 나라들이 협상 테이블에서 자국의 이익을 위해서 머리를 굴리고 있을 때 정치경제적으로 소외된 많은 사람들이 아픔과 고통 속에서 죽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악하고 무법이며 부정을 저지르는 위반’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선진국은 자국의 경제발전을 위해서 쏟아내는 오염물질과 경제논리에만 집착한 나머지 자연환경을 파괴한 그 죄를 속죄해야 할 것이다.
더 나아가 종교적 측면에서 그리스도인은 특정한 나라나 종교를 표방하는 남의 땅을 함부로 밟는 행위를 저지름으로서 자신의 믿음을 정당화하는 탐오배(貪汚輩)라는 비판을 듣지 말아야 함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그러므로 이 모든 것들은 하나님이 보실 때는 선을 넘어선 오만이자 하나님의 마음에서 빗나간 죄라 말해야 옳지 않겠는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