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무애(無碍)라는 말이 있다. 사전적인 의미로는 막힘이나 거침이 없음, 장애물이 없음이지만, 이 말을 불교에서 산스크리트어 ‘아푸라티하타’를 의역하는 말로 사용하므로 그 쓰임의 깊이가 한층 깊어졌다. 이를테면 불가에서는 ‘무애지’란 말을 사용하는데 그것은 무엇에도 거리낌 없이 모든 사리에 통달한 지혜를 말한다. ‘무애인’은 아무 것에도 막힘이나 거리낌이 없는 사람을 말한다.

▨… 원효는 무애인이었다. 아들 설총이 태어나면서 스스로 승복을 벗고 소성거사(小姓居士)라 이름하며 서민들과 더불어 술집 드나듦도 마다하지 않았다. 어느 때는 사당 안에서 악기를 연주하며 조각에 빠지기도 하였다. 당시의 승계는 그런 원효를 향하여 ‘바람맞은 미치광이’라 비난하며 경멸하였다. 그러나 원효는 실천궁행을 목표로 하여 자신이 옳다고 믿는 바를 행동으로 실천하였다.

▨… 앗시시의 성 프란체스코는 ‘라 베르나 산’에서 40일 동안 금식 기도를 드렸다. 기도의 제목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주께서 겪으신 고난을 저의 영혼과 몸으로 체험케 해주소서라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주님의 충만한 사랑을 저도 당신을 향하여 품을 수 있게 해주시옵소서였다. 40일 기도를 마치던 날 그의 두 손과 발, 옆구리에 예수의 흔적(갈 6:17)이 나타났다. 얼마 안 되어 그는 두 눈의 시력을 잃고 장님이 되었다.

▨… 프란체스코는 예수님의 가난을 지극히 흠모했다. 자신은 가난과 결혼했으며 자신의 아내는 ‘귀부인 가난’이라고 하였다. 그는 수도원에 은둔하지 않고 세상 속으로 들어가 의식주의 문제를 탁발(托鉢)로 해결하였다. 재를 얼굴에 뿌려 스스로 숯검댕이가 되어서는 “모든 것은 흙이다. 모든 것은 먼지다. 재다. 나, 프란체스코도 먼지요, 재다.”라고 일갈했다.

▨… 원효가 무애인이라면 성 프란체스코도 무애인이다. 몸 담은 곳은 불교와 기독교였지만 자신을 철저하게 비워 거칠 것이 없었다는 점은 많이도 닮았다. 세월 탓일까.세상 탓일까. 종파를 떠나서 무애인 비슷한 사람 보기도 하늘의 별 따기만큼이나 어렵다. 목사들의 명함에 무슨 직함 무슨 학력이 그리도 휘황찬란한 지, 예수께서도 무애인 목사가 그리워지시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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