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부부터 손자까지 5대째 이어진 신앙 … 군위교회 역사와 함께 해
오랜 신앙 기초로 어린이집·노인요양원 통해 사회복지에도 헌신

지난 10월 17일 창립 90주년 기념감사예배를 드린 군위교회. 이날 많은 성도들이 교회가 지역에서 가장 먼저 뿌리를 내리고 큰 부흥을 이룬 것에 대해 큰 감격과 기쁨을 느꼈지만 노태화 장로(사진)의 감회는 남달랐다. 교회 건축위원장으로 첫 예배당 문화재 등록 및 본당 리모델링 공사를 마치고 봉헌식을 드린 기쁨도 컸지만 조부부터 부친, 아들, 손자까지 5대째 한 교회를 섬겨온 지난날이 영화의 한 장면처럼 스쳐갔기 때문이다.

노 장로의 조부 노성문 집사는 처음 어머니 손에 이끌려 군위교회를 나오게 됐다. 노 집사의 어머니는 자식 서너 명을 차례로 잃고 난 후 “교회를 다니면 아이가 죽지 않는다”는 어느 선교사의 말을 듣고 교회를 나오게 됐다.

그렇게 어머니 손에 이끌려 교회를 나오면서 신앙을 갖게 된 노 집사는 교회 일을 자신의 일처럼 여기고 헌신하던 일꾼이었다. 그러나 그는 1937년 군위교회가 첫 예배당을 건축하면서 구 예배처소를 철거하던 중 불의의 사고로 이종익 담임목사와 순직했다.

그가 흘린 헌신의 피 위에 첫 예배당은 건축됐고 지난 2007년 등록문화재 291호로 지정돼 지금도 성도들의 신앙을 일깨우고 있다. 군위교회는 그와 이종익 목사의 순직을 안타까워하며 창립 70주년을 기념해 순직기념비를 세웠다. 

부친 노도봉 목사는 군위지역에서 고아원을 운영하며 소외이웃을 향한 사랑을 실천했다. 그는 뒤늦게 목회사역에 대한 소명을 받아 신학대학을 입학, 졸업 후 미국으로 건너가 한인교회를 목회하다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노태화 장로는 “부친은 하루도 거르지 않고 가족들과 매일 아침, 가정예배를 드렸던 분”이라며 “그런 부친의 신앙이 5대까지 영향을 미쳐 가족 모두가 바른 신앙을 갖게 된 것 같다”고 회고했다.

현재 군위교회에는 노 장로의 아들 노성종 집사, 손자 노원겸 어린이도 출석하며 선조의 교회 사랑을 이어가고 있다.  

젊은 시절 마산에서 고등학교 교사를 준비하던 노태화 장로는 부친의 도미 후 고향 군위로 내려와 사회복지사업에 헌신하게 됐다. 부친이 운영하던 고아원이 없어지고 난 뒤 군위지역에는 아이보육시설이 절대적으로 필요했고 노 장로는 이를 감안해 어린이집을 설립했던 것.

이후 35년을 한 결 같이 어린이집 사역을 펼쳤던 노 장로는 지난 2007년 30년 이상 보육사업에 종사한 공로로 대통령 표창을 받기도 했다.

노 장로는 또 지난해 ‘SMS그린힐 군위노인요양원’을 설립하고 노인복지까지 사역을 확장했다. 이는 시대적 변화에 대한 고민에서 출발한 것으로, 출산율 저하로 인해 어린이집 운영이 갈수록 어려워지는 현실 때문이다. 군위지역 만해도 지난 5년간 출생신고가 한 건도 없었다는 것. 

군위군 대북리 5610㎡(1700평) 대지에 1551㎡(470평) 규모로 지어진 군위노인요양원은 현재 50여명의 장애·치매노인들을 섬기면서 하나님의 사랑과 복음을 전하고 있다.

노인들의 경우, 비기독교인 혹은 젊었을 적 믿음생활을 하다가 포기한 사람들이 많기 때문에 요양원은 복음의 황금어장이 될 수 있다는 게 노 장로의 생각이다. 노인들이 치료를 받고 있을 때 복음을 전하기도 하고 주일 아침에는 예배도 함께 드리면서 하나님을 증거하고 있다. 

현재 군위어린이집은 노 장로의 사모가, 노인요양원은 그가 직접 운영하고 있지만 일선에서 은퇴하고 난 뒤에는 그의 아들들이 사역을 도울 수 있기를 희망하고 있다.

노 장로는 자신의 인생을 돌이켜보면 “젊었을 적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포기하고 사회복지 사역에 종사하게 된 것도 이를 통해 복음을 전하라는 하나님의 뜻으로 생각한다”면서 앞으로도 군위교회를 섬기고 복음을 전하는 일에 헌신하고픈 소박한 꿈을 내 비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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