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에서 우리는 예정(Praedestinatio)이라는 심오한 주제와 만난다. 성서는 하나님이 세상에서 일을 하시는 방법 중의 하나로 자신의 결정행위와 연관된 특수한 자유를 가지고 계심을 천명하고 있다.
신약의 마 22:14(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받은 자는 적으니라)이나, 구약의 쌍둥이 형제, 야곱과 에서에 대한 다양한 본문들(예를 들어, 창 25:23, 말 1:2~3, 이를 바울이 롬 9:13에서 수용)이 예정에 대한 대표적 인용 구절들이다. 이 외에도 예정의 의미를 이스라엘 국가와 같은 공동체적 관계에서 사용하는 신 32:8, 시 33:12, 사 43:10 등을 예로 제시할 수 있고, 이것이 신약에서는 다시 교회라는 공동체에 적용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딤후 2:10, 벧전 2:9).
그런가 하면 결정적으로 예정이 그리스도의 사역을 묘사하기 위해서 사용되어진 구절들이 있음을 알게 된다(행 4:28, 엡 1:5, 1:9, 1:11, 3:11, 눅 9:35). 지금까지의 짧지만 다양한 예들에서도 드러나는 것처럼 예정은 무시해서도 안되고 무시 할 수도 없는 경륜적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런데 이 예정에 대한 경건한 신앙이 또한 오해의 대상이 되어왔다는 것도 아이러니컬한 사실이다. 종교학적으로 살펴보면 예정은 거의 모든 일신교의 교리적 특성을 이루고 있다. 그리고 그 종교들 속에서 예정은 흔히 ‘기계적 결정론’의 이론적 근거와 결과를 위해서 오용되고 있는 것이다. 유명한 종교학자 R. 오토(Otto)는 이러한 사정을 감안하여 예정을 ‘무시무시한 신비(tremendum mysterium)’혹은 ‘무시무시한 엄숙함(tremendum majestas)’안에서 발생한 피조물로서의 인간이 가지는 감정이라고 설파한 적이 있다.(R.Otto, Das Heilige, Muenchen, 1963)
실제로 인간이 전능하신 하나님의 권능 앞에서 그의 뜻 이외의 다른 무엇을 어떻게 희망할 수 있겠는가? 그래서 많은 교회의 경건한 신앙인들은 예정에 대한 신앙은 단지 하나님의 무시무시한 결의(tremendum decretum)에 대한 무조건적 순종이라고만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이는 성서가 지시하는 예정론과 상관이 없다.
우리는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믿게 될 때 한계상황에 접할 때가 많으며 수수께끼 같은 질문으로 내몰리게 되는 것이 사실이다. “하나님이 이 세상을 구원하신다는 섭리에도 불구하고 왜 많은 사람들이 믿지 않고 있는가?” 즉 “하나님의 예정은 모든 사람들에게 보편적으로 주어진 것인가?”, 아니면 “어떤 특정한 부류의 사람들에게만 예정이 성립되는 부분적인 것인가?” 등 우리가 쉽게 답변할 수 없는 질문들이 생기는 것이 사실인 것이다.
더욱이 하나님의 신앙을 확고하게 하기 위해서 어거스틴처럼 ‘거부할 수 없는 은총(gratia irresistibilis)’을 인정하자면 우리는 자연히 예정의 사유로 접어들게 되어 “이 모든 것들이 미리 결정된 것이 아닌가?”라는 의문을 품게 된다. 혹시 그렇게 결정되었다면 우리의 행위의 모든 결과를 아시고 그런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하나님이 우리의 행위의 결과를 아는 것이 과연 창세 전인가(Supralapsarismus) 아니면 창세 이후의 것인가(Infralapsaris mus)? 라는 질문으로도 연결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난제와 심오한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기독교에서 예정의 이론이 의미가 있는 것은 구원의 사건으로서의 예정의 본질을 잊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이 물음에서 다시 우리는 하나님의 전능성과 인간의 책임성의 사이의 영역에서 나름대로 중간적 사유의 영역을 찾아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즉 우리의 노력은 전능하신 하나님과 그의 섭리를 강조하면서 일방적인 기계론적 결정론을 벗어나야 하고 이와 마찬가지로 제한된 의미에서의 인간의 자유를 인정함으로써 인간의 책임 또한 분명하게 설정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모든 형이상학적 논의들은 예정에 대한 성서의 근본 의도를 알 때 해명될 수 있다. 벧전 1:20에 기록한 것처럼(그는 창세 전부터 미리 알리신 바 된 자나 이 말세에 너희를 위하여 나타 내신 바 되었으니) 사실 예정은 하나님의 인간을 향한 맞춤서비스라는 성서의 메시지가 분명해질 때 올바른 방향으로 해석될 수 있는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