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즈음 한국사회에서 정의(正義)가 상한가를 치고 있다. 유명환 외교통상부 장관의 여식이 관여되었던 특채 문제로 야기된 사회적 정의에 대한 일반 대중의 분노가 정가에 사정(司正) 태풍을 가져 올 기세이다. 정치권의 문제와 상관없이 마이클 샌델(Michael J. Sandel)이라는 하버드의 한 학자가 내놓은 ‘정의란 무엇인가?’(김영사, 2010)라는 30년에 걸친 강의록이 공전의 히트를 치면서 36쇄라는 기록적인 판매를 이어가고 있다. 우리 한국 사람들 모두가 이렇게 정의에 목메어 한다는 것은 예전에는 미처 몰랐던 일이다.
그렇다면 정말 정의란 무엇인가? 주변의 불편한 현실들과 만나면서 우리도 정의와 공정한 사회에 대한 희망과 좌절을 동시에 경험하고 있지 않는가? 불평등과 부정의를 느끼면서도 그것을 고칠 힘이 없다는 한계에 부닥쳐 스스로에게 냉소적이 된 적이 얼마나 많이 있는가? 하나님은 공평하시고 정의로우신 분인가?
감사한 것은 이와 비슷한 고민을 해 주는 동료들이 있다는 것이다. 샌들과 같은 윤리학자들이 그런 경우이다. 샌델은 위의 책에서, 우리를 난감하게 만드는 실례들을 통해 압축된 형태로 다양한 윤리이론들을 검토하며 정의에 대한 실마리를 풀어간다. 그는 주로 존 롤스(John Rawls)의 정의론을 수정하는 공동체주의적인 정의론을 내세우는 것을 통해 정의의 문제를 해결해 보고자 한다.
먼저 그는 롤스의 견해가 상당히 설득적이며 정의의 문제에 있어서 성공적인 접근방법이었음을 주지시키고 있다. 롤스에 의하면, 정의를 고민하는 올바른 방법은 “원초적으로 평등한 상황에서 어떤 원칙에 동의해야 하는가를 묻는 것” 이었다. 그리고 이를 실행하는 방법론으로 하나의 가상의 사고실험을 제기한다. 소위 ‘무지의 장막의 원칙’이라는 것인데 모든 사람이 현재 자기가 가지고 있는 형편과 처지, 그리고 존재의 모습을 완전히 모른다는 가정 하에서 가장 공정한 것이 무엇일까를 생각해보는 일이다. 그렇게 할 경우 먼저 우리는 가장 기본적인 종교의 자유와 신념의 자유 등과 같은 것은 모든 사람에게 허용할 것이라고 말한다. 즉 공리적 판단에 따라, 즉 자기의 이익을 쫓아서 타인의 기본적 권리를 함부로 침해하지 않으리라는 것이다.
두 번째로 그에 덧붙여 ‘차등의 원칙’이라는 것을 제시한다. 이는 분배원칙을 제시하는 것인데 한 마디로 모든 사람들이 ‘공동의 운명을 공유한다고 생각하고’, ‘또한 우연히 주어진 선천적이거나 사회적인 환경을 (자신을 위해) 사용하려면 그 행위가 반드시 공동의 이익에 도움이 되어야 한다’는데 동의하자고 제안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롤스의 견해에 샌델은 무엇을 덧붙이고 싶은 것일까? 샌델은 사람들이 그렇게 모든 것으로부터 벗어나 있는 무지의 장막의 원칙을 실행할 수 있는가? 하는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오히려 사람들은 그 공동체의 일원이기 때문에 그 공동체의 선이라는 것을 생각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롤스의 정의론이 형식적이었다면 샌델은 거기에다 피와 살을 입혀서 좀 따듯하게, 구체적인 현실에서 생각해보자는 제안을 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여기에 오히려 질문이 생긴다.
현실로 돌아 왔을 때, 어떤 공동체에 속해야만 하는 현실 속에서 우리는 과연 공동선이라는 것을 발견할 수 있는 것일까? 어떤 공동체에 속하였다는 것, 그리고 어떤 종교나 역사 공동체에서 추구하는 선의 경험이 우리를 움직이게 할 수 있는가? 문제는 바로 “다른 사람들을 독려해서 그 공동체의 문제를 해결하도록 정열과 희망, 그리고 미래에 대한 확실한 비전을 이끌어 낼 수 있는가?”에 놓여있다. 이렇게 사람들을 움직일 수 있을 때 그 정의론은 올바른 것이 될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정의롭고 공정하신가? 하나님은 인간이 되시기로 예정하신다. 우리의 처지로 들어오셔서 우리의 문제를 감싸 안으시고 눈물과 피를 흘리시고 죽으시기까지 함께 해주신 분이시다. 그러면서 우리를 고쳐주시는 분이다. 우리의 눈물의 자리에서, 우리의 억울한 자리에서, 모두가 이 예수를 만날 수 있다면, 우리는 다 알게 된다. 하나님은 공정하시고 정의로우신 분이라는 것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