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것은 좋은 것이여!

‘우리 것은 좋은 것이여’라는 말이 유행한 적이 있다. 사중복음을 생각하면 역시 ‘우리 것은 좋은 것이여’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사중복음이 좋다는 것은 우리 것을 가지고 덕을 본 성결교회 바깥의 인물들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중생의 복음을 가지고 많은 이익을 본 사람은 구원파의 권신찬이다. 그는 죽었지만, 그가 중생을 강조하여 모은 돈으로 설립한 회사가 한강 유람선을 운행하고 있다.

조용기 목사는 일찍이 신유의 복음을 강조하여 전 세계에서 가장 큰 교회를 이루었다. 재림의 복음을 이용하여 크게 덕을 본 사람은 이장림이다. 시한부 종말론을 외치면서 그가 모은 돈이 약 90억 정도라고 재판에서 밝혀졌다. 비록 몇 년 동안 징역살이를 하긴 했어도 그 돈이 어딘가? 그 정도의 돈을 줄 터이니 몇 년 감옥에 갔다 오겠냐고 하면, 아마 지원자가 줄을 설 것이다. 아니 그 보다 훨씬 적은 돈이라도 지원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을 것이다. 우리 것을 우리가 활용하지 않으니까, 엉뚱한 사람들이 사용하여 크게 재미를 보았다.

원래 남의 손에 있는 떡은 크게 보이는 법이다. 장로교회와 감리교회의 부흥과 성장을 부러워한 나머지 그들의 여러 제도와 의식, 그들의 신앙 행태, 심지어는 그들의 신학이나 교리까지도 흠모하는(?) 이상한 버릇이 생기면서, 우리 것은 잊혀져가게 되었다. 그들의 부흥과 성장이 오히려 우리의 부흥회 운동과 전도와 기도의 열정을 본받은 것임을 알아야 한다.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인 것처럼, 가장 성결교회다운 것이 가장 참 교회적인 것임을 알아야 한다. 사중복음은 가장 성결교회다운 것이며, 동시에 참 복음, 온전한 복음이다.

사중복음 가운데서 아직까지 다른 교파의 교회나 지도자가 사용하지 않은 것이 성결이다. 그런데 요즘 낌새가 불안하다. 감리교회에서 성결(성화)을 강조하는 운동이 보이고, 또 성결에 대한 책들이 출판되고 있다. 감리교회야 웨슬리안의 종갓집이니까 당연하다고 할지라도 요즘에는 장로교회에서도 성결(성화)을 강조하는 목회자들이 여럿이 있으며 또 성결에 대한 책들이 여러 권이 출판되고 있다.

칼빈주의 신학자들 중에서 칼빈이야말로 성화를 강조한 신학자라고 주장하는 학자들이 있다. 성결교회에서는 성결에 대하여 책을 쓴 사람은 필자 밖에 없는데 이제는 독점권이 위태롭게 될 지경에 이르렀다. 이러다가 성결마저도 다른 교단에 뺏기는 것이 아닌가 하는 염려가 점점 강하게 밀려온다. 아직 다른 데서 이용하지 않은 성결의 복음을 목회와 성도의 생활에서 잘 활용하여 큰 덕(?)을 봐야겠다. 우리 것은 정말 좋은 것이니까!

중생은 죄로 말미암아 영적으로 죽은 자가 그리스도 안의 어린아이로 새로 태어나는 사건이다. 어린아이가 태어나면 분명히 사람이지만 아직 사람답지 못하며, 분명히 내 자식이지만 아직 자식답지 못하며, 분명히 대한민국 백성이지만 아직 백성답지 못하다. 그는 이제부터 사람답게, 자식답게, 그리고 백성답게 자라가야 하며, 언젠가는 온전히 성장한 단계에 이를 것이다.

중생으로 태어난 아이가 어른으로 자라나는 과정과 완성이 성결이다. 다시 말하면 중생은 성결의 시작 즉 초기 성화이며, 자라는 과정은 점진적 성화이며, 온전히 성장한 단계를 완전한 성화, 완전한 성결, 또는 그리스도인의 완전이라고 한다. 성결교회는 원래 완전성결이라고 하였는데 요즘은 그냥 성결이라고 약칭으로 사용하고 있다.

자식은 부모를 닮아야 하고 또 닮게 되어 있다. 내가 닮기 보다는 부모의 유전자를 통해서 내게 주어진 것들이다. 성결은 하나님을 닮는 것이다. 아니 내가 닮기 이전에 하나님이 당신의 거룩한 성품을 내게 주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중생과 마찬가지로 성결도 하나님의 은혜이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믿는 자들은 아버지를 닮아야 한다. 닮은 것이 아주 부족하다면, 소설처럼 발가락이라도 닮아야 한다. 성결은 또한 예수의 마음을 품고 그를 따라 사는 삶이다. 닮는 것 즉 주님을 따라 사는 삶은 성령 안에서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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